10년 만의 ‘탈원전 폐기’ 눈앞에 둔 유럽, 獨 빼고 줄줄이 원전 유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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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센터 등 전력 수요 급증에 대체 전원으로 원전 부상
러-우크라 전쟁 장기화로 인한 천연가스 가격 상승도 영향
유럽서 첫 원자력 정상회의 개최하며 탈원전 논의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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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탈원전 국가인 이탈리아가 35년 만에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원자로 개발에 나선다. 이탈리아 외에도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선언했던 프랑스, 스위스, 영국, 스웨덴 등 유럽 주요국들이 ‘탈(脫)탈원전’으로 돌아서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대란, 데이터센터·AI(인공지능) 붐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 상황이 탈탈원전을 가속화했다는 분석이다.

탈원전 1호 국가 이탈리아, 35년 만에 핵에너지 생산

9일(현지시각) 아돌포 우르소(Adolfo Urso) 이탈리아 산업부 장관은 자국에서 열린 암브로세티 국제경제포럼에 참석해 “조만간 이탈리아에서 첨단 핵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외국과 기술 파트너십을 통해 새로운 법인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탈리아 내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를 생산할 산업 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SMR은 전기 출력이 300MWe(메가와트 일렉트릭, 1MWe=100만W 전기 출력) 미만인 소형 원전으로, 원자로 모듈의 공장 생산이 가능해 기존 대형 원전의 단점을 보완한 차세대 원전으로 평가받는다.

블룸버그통신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현재 이탈리아 정부가 SMR 개발을 위한 법인 설립과 관련해 원자력 발전소 기술 개발 업체인 안살도 뉴클레아레, 이탈리아 최대 전력기업 에넬, 영국 원자력 기술 회사 뉴클레오 등과 초기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SMR 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한 입법도 추진 중이다. 지난 7일 질베르토 피케토 프라틴(Gilberto Pichetto Fratin) 환경에너지부 장관은 “SMR 투자를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을 올해 말까지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이탈리아 환경에너지부는 지난달 “10년 내 SMR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탈리아는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원전을 보유한 국가였지만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원전 4기의 가동을 중단하고 이듬해 탈원전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투표에서 국민의 80%가 탈원전을 지지했고 1990년 마지막 원자로가 폐쇄되며 세계 최초의 탈원전 국가가 됐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원전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2011년 원전 재도입을 위한 국민투표가 시행됐지만 그해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반대 90%로 원전 재추진이 무산됐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았고 최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로 진격하면서 또다시 가파른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전력 수요까지 급증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됐다. 이탈리아 정부는 2050년 전기 수요가 현재의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에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인프라 교통부 장관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며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원자력을 통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 생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신규 원전 도입에 찬성하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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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23년 EU의 전력 생산/출처=EuroStat

전쟁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원전 부활’ 모색하는 유럽

탈원전을 폐기하는 국가는 비단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글로벌 탈원전 기조를 이끌어 왔던 유럽 주요국이 10여 년 만에 원자력발전으로의 유턴을 선언하고 있다. 독자적인 대형 원전 기술을 보유한 ‘원전 강국’ 프랑스가 가장 발 빠르게 탈원전 정책을 폐기했다. 프랑스는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당선 이후 ‘원자력 의존도 50%’ 달성의 목표 시기를 2025년에서 2035년으로 연장하는 등 원전 정책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2022년 2월 발표한 ‘에너지 정책 방향’에는 신규 원전 개발 계획을 담기도 했다. 운영 중인 원전 56기의 수명을 60년 이상 연장하고 오는 2050년까지 6~14기의 원자로를 시운전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수력발전 의존도가 50%가 넘는 ‘친환경 에너지 강국’ 스위스도 탈원전 정책을 철회했다. 지난달 29일 알베르트 뢰스티 스위스 에너지부 장관은 신규 원전 건설을 허용하는 내용의 원자력법 개정안을 올해 말까지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뢰스티 장관은 “원자력발전소는 전력 공급을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로 이 선택지를 유지하지 않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배신”이라며 “2050년 탄소 중립을 위해 다양한 기술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전 신규 건설이 15년 뒤 필요하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국은 해상풍력만으로는 전력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해 지난해 원자력청을 신설,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4배로 늘리기로 했고, 1980년 국민투표로 단계적 탈원전을 선언한 스웨덴도 지난해 “2035년까지 2기, 2045년까지 10기의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밝히면서 43년 만에 탈원전 정책을 폐기했다. 이들 국가 외에도 체코·폴란드·슬로베니아·헝가리·튀르키예·네덜란드·핀란드 등이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올해 3월 유럽연합(EU) 의장국인 벨기에 정부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공동으로 ‘원자력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원자력 에너지와 관련해 유럽에서 열린 사상 첫 정상급 회의로, 당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원전의 안전한 가동은 청정 에너지원을 대규모로 확보하기 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이라며 “넷제로를 향한 가성비 좋은 경로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EU의 기후 목표, 에너지 안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원자력에 대한 정부의 자금 조달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탄발전 의존 커진 ‘재생에너지 선진국’ 獨의 딜레마

이런 가운데 사실상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은 딜레마에 빠졌다. 지난해 4월 마지막 원전 3기의 운영을 중단하며 탈원전 국가가 된 독일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59%에 이른다. 나머지는 재생에너지 간헐성의 대체 전원인 화력발전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한다. 독일의 화력발전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갈탄과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는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데 이 중 독일 내 매장량이 727억 톤(t)에 달하는 갈탄은 가장 풍부한 부존자원으로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천연가스 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갈탄을 이용한 석탄발전의 비중이 27%까지 상승했다.

문제는 석탄발전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탄소 배출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지난해 기준 독일의 탄소 배출도는 약 550gCO2/kWh로 원전 비중이 75%인 프랑스의 약 70gCO2/kWh와 비교해 8배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며 ‘재생에너지 선진국’으로 불리는 독일이 유럽 주요국 가운데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올겨울에도 천연가스가 높은 가격을 유지할 것으로 보여 석탄발전의 비중은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독일 안팎에서 “탈원전은 했지만, 탈석탄은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는 높아진 전기요금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보조를 위한 부과금과 송전망 증설 비용이 증가하면서 전기요금이 크게 상승했다. 석탄발전의 비중이 늘어난 것도 요금 상승의 원인이 됐다. 유럽 국가들은 온실가스를 배출할 때마다 ‘유럽연합 배출권거래제도(EU-ETS)’를 통해 배출권을 구매해야 하는데 석탄은 천연가스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두 배가량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h(킬로와트시)당 평균 41.6센트로 EU 27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이는 EU 평균인 28.5센트보다 46.0% 높은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