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잠식률 상승에 VC 위기론 확산, “펀드도 못 만들고 문 닫게 생겼다”

자본 잠식으로 시정 명령 받은 VC 7곳, 4곳은 펀드 결성도 못해 美도 투자 혹한기, 투자 보수성 증가에 VC ‘속수무책’ VC 업계 관심 갖는 금융지주사, “‘기울어진 운동장’ 형성될 우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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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 시장 위축으로 벤처펀드 결성이 어려워지면서 VC 재무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렇다 할 만한 벤처펀드 결성 및 운용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자본금만 까먹는 VC가 속속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는 자본 잠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아예 라이선스를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VC 재무건전성 ‘빨간불’, “최악의 경우엔 라이선스 반납해야 할 수도”

1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자본 잠식’을 이유로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시정 명령을 받은 VC는 7곳으로 2020년 이래 최대에 달했다. 지난달에만 티움투자파트너즈, 지티오인베스트먼트, 엔벤처스, 와디즈파트너스 등 4곳이 자본 잠식으로 중기부로부터 경영 개선 요구를 받았다. 창업투자회사(창투사)는 벤처투자 촉진에 관한 법률(벤처투자법) 제41조 1항에 따라 경영 건전성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경영 건전성 기준은 벤처투자법 시행령 제29조에 따라 자본 잠식률 50% 미만이다. 중기부는 해당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창투사에 △자본금 증액 △이익 배당 제한 등 경영개선 조치를 요구할 수 있고, 창투사들은 3개월 내 자본 잠식률을 50% 미만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경영 건전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최대 6개월의 2차 시정 명령을 받게 되고, 최종적으로 자본 잠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라이선스를 반납해야 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금리 인상 등 영향으로 기관투자자(LP)가 벤처펀드에 출자하는 자금을 줄이면서 VC들도 경영난을 겪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올해 상반기 벤처펀드 결성 규모는 4조5,91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 줄었다. 특히 업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연금·공제회의 벤처펀드 출자액은 전년 대비 77.6% 줄어 1,076억원에 그쳤다. 중기부에 따르면 올해 자본 잠식으로 시정 명령을 받은 VC 7곳 중 4곳이 설립 이후 펀드를 결성하지 못하고 있다. VC 위기론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모양새다.

이와 관련해 한 VC 대표는 “요즘엔 모태펀드 등 앵커 출자자를 확보해도 민간에서 자금 매칭이 쉽지 않다”며 “VC의 주요 수익원인 펀드 관리보수를 받지 못해 자본금만 깎아 먹다 문 닫는 곳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금줄이 마르자 VC 간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투자 네트워크가 잘 형성된 대형 VC나 트렉레코드(운용 성과)가 좋은 일부 VC에만 자금이 쏠릴 수밖에 없어서다. 또 다른 VC 대표는 “일부 VC는 펀드 한 개도 결성해 보지 못하고 문을 닫을 수 있다”며 “업력이 오래된 VC는 침체기와 호황기를 여러 번 겪으며 현 상황을 대처할 수 있겠지만 과열된 시장에 진입한 VC는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미국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올 2분기 미국 내 스타트업 펀딩이 50%가량 줄어든 100억 달러(약 13조2,890억원)에 그치면서 자금이 바닥난 스타트업들이 폐업 수순을 밟고 있다. 특히 스타트업 펀딩 생태계가 마지막으로 호황이었던 2021년 하반기에 투자를 받았던 스타트업들이 올 하반기부터 줄줄이 자금 고갈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통상적으로 스타트업 펀딩은 2년가량의 런웨이(생존가능기간)를 보장하는 수준으로 이뤄지는 만큼, 결국 스타트업 생태계 위축 직후 펀딩을 진행하던 스타트업들은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가장 먼저 쓰러졌다. 대표적으로 올해 6월 결제 서비스 스타트업인 팬서가 폐업했다. 지난해 초만 해도 2,000만 달러(약 266억원)의 투자금을 모집하기로 약속됐지만 이후 상황이 급변하자 투자자들이 이탈했다. 이에 팬서의 창업자 맷 리들러는 사업 모델을 변경하고 정규직을 계약직으로 전환하며 현금 소진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후 투자가 줄줄이 불발되면서 결국 사업을 접었다.

금융지주사 VC 인수 사례 多, VC에 ‘비상구’ 될 듯

이런 가운데 최근 업계 사이에선 국내 금융지주사들이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VC를 설립·인수하는 사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금융지주사들이 비은행 부문 강화와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포석에서 벤처 투자를 강화하는 것이다. 금융지주사가 VC 업계에 뛰어드는 이유는 비은행 포트폴리오 확대를 통한 수익성 강화에 있다. 예대 마진을 통한 ‘이자장사’를 넘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VC 업계의 과실을 계열사를 통해 적극 거둔다는 취지다. 그간 은행들은 초기 기업 투자를 위해 외부 VC들에 자금을 출자해 왔는데, 직접 운용하면서 은행 대출까지 연계해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의지도 반영됐다.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VC 분야의 노하우를 쌓아 투자은행(IB)으로서의 역량을 다진다는 목적도 있다.

성과는 나쁘지 않다. KB인베스트먼트의 올 상반기 순이익은 155억9,200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57% 늘었고, 운용자산만 2조원이 넘는다. 우리금융지주가 지난 3월에 인수한 우리벤처파트너스(옛 다올인베스트먼트)의 상반기 순이익도 전년 대비 49% 늘어난 61억5,500만원으로 집계됐다. 신한벤처투자와 하나벤처스 역시 올 상반기 각각 22억6,100만원, 22억9,200만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거대한 자산을 보유한 초대형 은행들이 VC 산업에 진입하는 것은 양면적 효과가 있다. 고금리가 이어지면서 자금난을 겪고 있는 벤처기업들의 비상구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다.

다만 일각에선 다양한 VC로 흘러야 할 은행 자금이 관련 계열사로만 몰릴 경우 자칫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업이 계열사를 일방적으로 돕는 ‘일감몰아주기’와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다. 이렇다 보니 VC 업계에선 금융지주사 계열 VC들의 공격적인 확장에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은 “금융지주사 계열 VC들의 시장 진입은 전체 VC 시장 규모가 커지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자칫 은행 자금이 자신들의 계열 VC에만 몰릴 경우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VC 시장 정상화, 첫걸음은 정부가 떼야

한편 VC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선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서 나오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김현열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우리나라 VC 시장 규모는 글로벌 상위권이며, VC 업계에서도 자금 공급 수준을 풍족하다고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투자금이 양질의 벤처기업에 효율적으로 분배되는가 하는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존재한다. VC의 질적 성장과 경쟁이 필요한데,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VC의 전문성 등을 평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VC 시장 질적 개선 필요성이 제기된 이유는 금융 시장이 충분히 발전하면 추가적인 양적 성장이 더 큰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질적 개선을 통해 경제 전반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풍부한 벤처 자금이 그동안 양질의 벤처기업에 효율적으로 분배돼 왔는지 돌아봤을 때 물음표가 뒤따른 것도 문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박사는 “기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태펀드를 통한 자펀드의 투자 효과가 ROA(총자산이익률) 등 기업의 수익성 개선으로까진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정부 차원에서 금전적 지원을 이어왔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시장의 정부 의존도가 증대돼 민간 VC 생태계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나온다. VC 생태계 데이터베이스가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점도 주요 지적 대상이다. 김 박사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데이터 솔루션 업체들이 개별 펀드나 운용사 등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제공하는데, 한국에선 투자 규모 등 시장 전반 통계치 제공에 그치고 있다”면서 “투자·비용·수익률 등 기본 재무적 정보뿐 아니라 경영지원 서비스에 대한 내용, 성과와 실패 기록 등을 축적해 놔야 VC 시장 질적 개선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