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무조건 대기업만 고민하는 구직자의 맹점
‘회사 규모 = 업무 역량’이라는 편견 깨지는 시대 업무 역량에 초점 맞춘 커리어 설계해야 스펙 쌓기 벗어나 현장 경험 쌓아야 구직·이직에 유리
지난 28일 권고사직 상황에 직면한 CJ ENM의 30대 초반 직원 A씨가 직장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사내에서 업무 재배치를 직접 알아봐야 하지만 적절한 곳을 찾기 어려운 데다, 외부로 눈을 돌려도 헤드헌터 측에서 CJ ENM 출신이 시장에 이미 많이 있어 어렵다는 의견을 내놨다는 내용이다.
인사 관련 전문가들은 대기업 출신이라는 강점이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는 인력 시장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국가고시 및 공공기관 공채로 빠져나가는 인력을 제외하더라도 외국계 증권사, 전략 컨설팅 등의 사기업 최고 직장 다음에 취직하는 곳이 대기업이었던 2010년대 이전과 달리, 최근 들어서는 대규모 투자를 받은 벤처기업들에서 우수 인력을 채용해가고 난 다음 차점군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 직장의 회사 규모가 업무 능력의 잣대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회사 규모 = 업무 역량’이 아닌 시대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거쳐 2008년부터 인사 업무를 해왔다는 한 스타트업 인사팀장 B씨는 첫 직장 시절 인사 담당 선배들은 경력직 채용에 전 직장의 매출액, 자산규모 등으로 대변되는 기업 규모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 그런 경향성이 크게 사라졌다고 말했다. 업무 다분화가 잘 되어 있는 만큼 ‘취직하려는 회사의 방향성에 맞게 해당 업무를 얼마나 해왔는지’를 우선 관심 대상으로 삼고, 채용 결정이 내려진 후 경력 산정 등에서도 전 직장의 회사 규모보다 업무 역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어 구직자가 만족하지 못하는 급여를 제시했다가 재직 2개월 만에 타 기업으로 이직하는 사례를 몇 차례 겪으면서 스타트업계는 경력의 숫자나 회사 크기보다 ‘경력의 내용’에 훨씬 더 집중하는 형태로 바뀌었다고 부연했다.
CJ ENM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홈쇼핑을 담당하던 커머스 사업부문과 연극, 뮤지컬 등을 담당하는 공연 예술, 영화 산업 일부에서 현재 부서 수준의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일부 직원의 경우 타 부서로 재배치가 가능하나, 매각이 3년째 답보 상태인 CJ CGV 관련 업무 담당자들의 경우는 계열사 순환 배치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파다한 만큼, 사실상의 권고사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커머스 사업 중 홈쇼핑에서 지난 2022년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감소하자 홈쇼핑 사업부문도 축소해 OTT쪽으로 사업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만약 A씨가 공연 예술 부문에 공채로 들어간 거라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업무를 찾아봐야 할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CJ ENM이 ‘한국의 디즈니’를 목표로 공연 예술 경력직을 대규모로 채용할 당시, 관련 현장 인력을 중심으로 뽑았으나, 이후 공채로 뽑은 신규 채용자의 경우 영화 사업부에 지원했다 떨어진 경우에 공연 예술 쪽으로 배정된 경우가 많았고, 현장 사정을 잘 모른 채 문서 작업 위주의 내부 업무만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이런 인력들은 현장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CJ ENM 정도의 대기업에 관리 인력으로 이직하지 않으면 30대 초반까지 쌓아온 몇 년간의 업력과 상당히 다른 업무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무조건 대기업’ 보다 커리어 생각해 구직에 뛰어들어야
2016년에 한국 사업을 접은 바클래이즈 캐피탈에서 파생상품과 채권 영업직 업무를 맡았던 C씨와 D씨의 경우 한국 사업부가 폐쇄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국내에 계속 사업부가 있던 파생상품 영업부는 타 사로 이직이 가능했지만, 채권 영업은 국내 증권사에서도 40대 명퇴가 계속되었던 탓에 적절한 이직처를 찾을 수 없었다. 취직 당시에는 큰 차이가 없던 업무였으나, 막상 이직처를 찾게되니 한국에 영업이 계속되는 곳과 아닌 곳 간의 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CJ ENM 직원 A씨의 경우도 입사 동기들과 업무 배정이 이뤄지던 시점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수 있으나, 시장 상황이 바뀌면서 외부에서 업무 역량을 평가받게 되는 시점이 되자 이른바 ‘커리어가 꼬인’ 상태가 된 것이다. 인사팀장 B씨는 “도쿄대 법대 출신만 반복하던 지원자가 놀림감이 되었던 것처럼, 대기업 출신이라는 것만 반복하면 놀림감으로 전락한다”며 “본인의 업무 역량과 시장 상황에 맞춰 기민한 변화를 이어 나가야 계속해서 커리어를 쌓아나갈 수 있다”는 설명을 내놨다.
연극 관계자 E씨의 경우 2000년대 초반까지는 국내 최고의 연극인이었지만, 연극 환경이 바뀌면서 이제는 현장에서 불필요한 인력이 되어 버렸다. 한때 연 10억원 이상의 고수익을 올렸으나, 지금은 까마득한 연극 후배에게 KTX 차비를 빌렸다가 갚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연극계 후배의 설명이다.
무조건 공기업, 무조건 대기업의 종말
지난 2018년 일부 대기업들이 공채를 폐지하고 수시 채용으로 인력 채용 방식을 변경하겠다고 밝혔다. 공채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수시 채용은 나날이 확산되는 추세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지난 2021년 매출 상위 500대 기업들의 신입 직원 비율은 62.4%, 경력직은 37.6%였다. 경력직 중 수시 채용자는 80.3%에 달했다.
과거처럼 취업 준비를 위해 이른바 ‘스펙’ 쌓기를 할 것이 아니라, 인턴십 등을 통해 현장 업무를 익혀 ‘즉시 전력감’이 되는 것이 취업의 성패를 가름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2022년 들어 더 심해졌다. 대기업들은 인턴 채용을 11.8%에서 30.4%로 늘렸고, 중견기업도 6.3%에서 16.2%로 인턴 채용의 비중을 늘렸다. 한편 정규직 정기 공채는 17.4%로 줄어들었고, 정규직 수시, 상시 채용 비중이 52.2%로 늘어난 것도 주목할 점이다. 채용 인원 중 ‘서로 챙겨주는 동기’라는 의식이 형성되는 집단의 비중이 전체의 20% 미만으로 떨어진 것이다.
인사 전문가들은 ‘취업 준비’가 ‘스펙 쌓기’, ‘점수 만들기’로 이어지는 과거의 관점을 벗어나야 채용 시장에서 선택받는 것을 넘어, 장기간 커리어를 쌓아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영어 시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사 담당자가 보기에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라는 판단이 설 수 있을 만큼의 현장 업무 역량이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