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불황기, VC마저 ‘스팩 합병’으로 활로 모색
캡스톤파트너스, HB인베스트먼트 등 우회상장하는 중견 VC들 벤처투자 회수시장 불황기 끝나지 않았다는 방증 공모주 열기 빠르게 식으며 IPO 시장 위축되자 ‘스팩 쏠림’ 현상 거세져
국내 주요 벤처캐피털(VC)들이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합병 방식으로 증시 입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벤처투자 회수시장이 불황기를 맞은 가운데 공모로 인한 기업가치 훼손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기업공개(IPO)보다 비교적 수월한 절차상의 이점을 누리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지난해부터 스팩 상장 추진해 온 VC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캡스톤파트너스와 HB인베스트먼트 등 실적이 탄탄한 VC들이 스팩을 이용한 우회상장 절차에 들어갔다. 중국 IT 기업 텐센트를 주요 출자자(LP)로 유치하며 규모를 키운 캡스톤파트너스는 지난해 말 기준 약 운용자산(AUM) 규모가 약 4,000억원에 달하며, 당근마켓, 드라마앤컴퍼니(리멤버), 직방 등의 기업을 포함해 약 100개 이상의 스타트업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캡스톤파트너스는 오는 10월 9일을 합병기일로 NH스팩25호를 흡수합병할 계획이다. 지난해 NH투자증권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상장을 준비해 왔으며, 올해 1월에는 주식 액면금액을 5,000원에서 200원으로 낮추는 액면분할을 통해 주식 수를 25배 늘렸다. 이번 합병으로 조달하는 자금 규모는 약 54억원이 될 전망이다.
HB인베스트먼트도 스팩 합병을 통해 코스닥 입성에 나선다. 1999년 설립한 HB인베스트먼트는 문흥렬 HB그룹 회장, 코스닥 상장사 HB테크놀러지 등 HB그룹이 주요 주주로 있는 중견 VC다. 지난 2021년 유명 벤처캐피털리스트 황유선 대표가 합류한 이후 공격적으로 슈어소프트테크, 크라우드웍스 등의 신규 펀드를 결성하며 최근 몇 년 새 몸집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10월 NH스팩23호와 1대 0.85 비율로 합병 계약을 체결한 HB인베스트먼트는 올 초 합병일정을 조정하고 오는 6월 증권신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현재 금융감독원 심사를 앞둔 HB인베스트먼트는 합병으로 신규 자금 약 148억원을 확보할 것으로 보이며, 이를 신규 펀드 결성 등 회사의 이익 증대를 위해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까다로운 기업공개 공모 절차 우회하는 ‘스팩 합병’
스팩 합병은 까다로운 기업공개 공모 절차를 우회해 비교적 빠르고 쉽게 증시에 상장할 수 있는 모델이다. 상장사는 스팩 합병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비상장회사를 인수하거나 서로 합병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며, 상장 후 3년간 인수·합병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투자자에게 투자금을 되돌려주고 청산 절차를 밟아야 한다.
탄탄한 실적과 잠재력을 갖춘 비상장기업에는 상장을 통한 성장경로를, 투자자에겐 접근성이 제한된 비상장사의 지분에 대한 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점이 스팩의 장점으로 꼽힌다. 또 비상장사와 스팩 발기인(증권사)과의 합의와 외부평가기관의 기업가치 평가 등만 진행되면 별도의 수요예측 절차 없이 합병가액과 합병비율이 결정된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스팩 IPO 규모는 평균 90억원을 기록했다. 기업공개 이후 지분율은 73.7%, 일반투자자 15.8%, 스폰서 10.5% 수준이다. 통상적으로 스폰서 투자단가는 1,000원으로 일반투자자의 투자단가인 공모가의 2배다. 한편 인수인으로 참여하는 증권사는 건당 3억원 또는 공모금액의 3% 수준의 수수료를 수취하며 IPO 즉시 인수 수수료의 50%를, 합병 성공 시 나머지를 수령할 수 있다.
투자 시장 불황기 이어지자 부쩍 늘어나는 ‘스팩 상장’
지난 3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최근 스팩의 기업공개(IPO) 및 합병 동향 자료’에 따르면, 스팩 합병을 통한 증시 상장 건수는 지난해 45건으로 전년 25건 대비 80%나 늘었다. 2021년 인기를 끌었던 IPO 시장이 위축되자, 스팩 우회 상장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에는 창업 초기 기업들을 지원하는 액셀러레이터(AC) 블루포인트파트너스가 상장을 시도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젠 VC들마저 스팩 합병을 통해 증시에 입성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흥행불패 기록했던 전례와 더불어, 기업 입장에선 IPO보다 외부 변수가 적어 기업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낮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 투자자는 스팩 투자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유명세를 탄 스타트업이 비상장회사와 인수·합병을 추진한다는 소문이 반드시 높은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닌 데다, 합병이 성사되더라도 투자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팩의 대표발기인(증권사)이 합병 성사를 위해 일반 투자자에게 합병비율을 불리한 방식으로 평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금감원 조사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합병이 완료된 스팩 54개사 대다수가 본질가치 대비 합병 대상 법인의 가액을 할증하고, 기준시가 대비 스팩의 합병가액을 할인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금감원은 “대표발기인인 증권사가 합병 실패 시 손실이 발생하는 반면, 합병 성공 시 자문 수수료를 받고 스팩 주식 취득가액도 낮기 때문에 비상장법인에 대한 엄정한 평가보다 합병 성공을 우선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