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사우디 국부펀드 PIF, 논란의 투자 사례 분석 ② 러시아와의 오월동주
2015년 러시아 RDIF와 투자 협정 체결, 공동 사업 추진도 美 RDIF 전면 차단 등 제재에도 기존 투자 유지 및 추가 투자 최근 ‘나홀로’ 원유 감산 택한 사우디, 인플레이션 압력 우려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의 왕위 계승권자이자 총리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남자 ‘미스터 에브리씽’ 또는 영문 이니셜을 딴 ‘MBS’로 통한다. 약 2,700조원의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국부펀드 PIF(공공투자펀드·Public Investment Fund)를 이끌고 있다.
이러한 빈 살만에게는 든든한 오른팔이 있다. 지난 2015년부터 사우디 정부의 다양한 요직을 거치며 핵심 인사로 떠오른 야시르 알 루마얀 PIF 총재다. 2019년 세계 최대 석유 기업 사우디 아람코의 회장으로도 임명된 알 루마얀은 명실공히 사우디의 ‘금고지기’다. 아랍권 언론들은 알 루마얀을 ‘사우디 최고 권력을 가진 사업가’로 일컫지만 알 루마얀은 사우디 국왕이 이끄는 내각의 ‘책사’ 역할만 수행할 뿐 장관직에 임명되거나 정계에 진출한 적은 없다. 서방 언론들은 이러한 형태의 권력 구조를 두고, 왕세자 마음대로 재정을 주무르기 위해 알 루마얀이라는 꼭두각시를 앉힌 것이라 비판한다.
실제로 막대한 자금을 거침없이 쏟아붓는 왕세자의 공격적인 투자 방식으로 인해 PIF의 금융 전문가들이 제동을 걸기도 했으나, 왕세자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물론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기 위해 단행한 해외 투자로 연평균 12%의 수익을 올린 사례도 있다. 이는 세계 국부펀드의 평균 수익률인 9%보다도 높은 수치다. 하지만 모든 PIF 투자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왕세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정치적 이익이 반영된 투자가 주를 이룬 탓에 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상당하다. 특히 러시아 국부펀드와의 투자 협정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적과의 동침’ 택한 사우디
2015년 7월 PIF는 러시아 정부가 운영하는 RDIF(러시아직접투자펀드)와 100억 달러(약 12조8,000억원) 규모의 투자 협약 체결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합동투자기금을 조성해 제조업, 석유, 녹색에너지 인프라 중심의 공동 사업을 추진했다.
이란 핵협상, 시리아 내전 등 여러 현안을 두고 이견 충돌로 목소리를 높이던 사우디와 러시아가 불신과 반목을 뒤로하고 전략적 동맹 관계를 구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미국의 ‘셰일 붐’이었다. 미국의 셰일 증산 압력이 이어지자 국제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적과의 동침’을 택한 것이다. 또한 투자로 엮인 새로운 관계 구축을 통해 러시아를 시리아 문제에서 한발 물러서게 하려는 복안으로도 풀이된다.
사우디의 의도대로 양국은 우호적 관계를 이어나갔고, 25개의 공동사업이 한창이던 2019년 RDIF는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 신규 사무소를 개설한 데 이어 에너지 투자 플랫폼 관련 사업도 추가로 진행했다. 이뿐만 아니라 양국은 경제적 동맹 강화와 더불어 무기 공급 합의까지 이끌어내며 세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러-우 침공에도 투자 협력관계 유지
그러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양국 관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이는 듯 보였다.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이 러시아 연방 중앙은행의 모든 자산을 사실상 동결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면서 러시아 국부펀드도 전면 차단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 연기금 및 국부펀드(SOI)를 권역별로 분류했을 때 러시아 자산에 익스포저(위험 노출액) 규모가 가장 큰 지역은 중동 지역으로, 총 440억 달러의 투자금 중 약 69%가 중동 기관들의 투자금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관은 RDIF와 MOU 체결 후 합작법인 형태로 투자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국가 기관들과의 차이점이다. 사우디 PIF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RDIF에 100억 달러를 투자했다.
RDIF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 창구이자 러시아 부패의 상징으로 간주돼 왔다. 해당 조치로 인해 RDIF 총재이자 푸틴의 측근인 키릴 알렉산드로비치 드미트리에프도 제재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사우디 PIF를 비롯한 중동 국부펀드들은 더 이상 러시아와 투자 사업을 전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사우디 정부도 유엔(UN)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하는 등 서방의 제재 결정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PIF의 대(對)러 투자액은 여전히 100억 달러에 달하며 리야드에 위치한 RDIF 사무소도 영업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사우디 당국자들은 푸틴 대통령을 궁지로 몰지 않기 위해 러시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길 꺼리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제재로 인해 서방 및 중동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하는 와중에도 PIF가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사우디 투자회사 킹덤홀딩스가 러시아 에너지 기업에 6억 달러(약 7,680억원)를 투자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다.
바이든 망신 준 OPEC+ 감산 조치, 정치적 보복일까
이어지는 대러 경제 제재 조치에 글로벌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고유가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러시아의 석유 수출이 금지된 데 이어 천연가스의 금수 조치까지 확대되자 국제유가는 지난해 6월 초 배럴당 120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고유가로 인한 원자재 가격 폭등에 미국은 자이언트 스텝 단행과 더불어 전략 비축유까지 대규모로 방출하며 진정에 나섰지만 역부족으로, 결국 사우디 및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 증산이 절실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 때문에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과 관련해 사우디를 ‘국제사회의 왕따’로 만들겠다며 공언해 온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인권단체들의 비난에도 불구, 증산을 촉구하기 위해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으나, 오히려 대량 감산에 직면하며 망신을 당했다. 같은 해 10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가 하루 원유 생산량을 200만 배럴 감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는 세계 수요의 2%에 해당하는 규모로 당초 예상치를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국제유가 상승은 러시아의 전쟁 자금 조달을 돕는 결과를 초래하는 만큼, 미국은 러시아를 압박하는 차원에서 원유 감산에 반대해 왔지만 사우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산을 강행하며 사실상 미국 대신 러시아 편에 서는 행보를 보였다. 감산 조치가 사우디에 등을 돌렸던 미국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OPEC 내부 반발과 러시아 반대에도 ‘독단 감산’ 나선 사우디에 국제사회 비판
그러나 최근 사우디가 러시아와의 밀월 관계 종료를 예고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 눈길을 끈다. 지난 4일(현지 시각)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산유국 장관급 정례회의에서 사우디는 다른 OPEC+ 회원국의 추가 감산 동참을 요구했지만, 회원국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100만 배럴의 독단 감산에 나섰기 때문이다. 올해 4월까지만 해도 러시아와 사우디 주도하에 원유 감산을 단행했으나, 이번엔 러시아마저 동참하지 않으면서 나 홀로 감산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당장 양국 간 협력에 금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전망한다. 양국이 미국의 일부 정책에 반감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 서로를 배척하는 일은 없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추가 감산 조치 탓에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추진해 온 방어 정책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감산 발표 이후 지난 5일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전일 대비 4.75달러(6.63%) 급등한 배럴당 76.41달러를 찍는 등 국제유가가 출렁였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6월 말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전망했고, 골드만삭스도 연말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배럴당 90달러에서 95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국제유가 상승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조해 금리 인상을 촉발하게 되고, 이는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 이에 국제사회는 연일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우디는 서방의 비난은 신경 쓰지 않는다며 무시로 일관해 빈축을 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