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 소식에 엇갈린 연구계, “카르텔이 어디 있단 거냐” vs “악습 끊자”

“근거 없는 예산 재검토, 혼란만 가중할 것” “회의비 부풀리기 등 악습 많아, 이젠 끊어내야 할 때” 전문가 지배하는 비전문가, 예산 편성·과제 선정도 ‘엉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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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정부가 ‘국가 R&D(연구개발) 예산 전면 재검토’ 작업을 시행하겠다고 밝히자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 연구자 협의체가 반발하고 나섰다. 현장 혼란을 야기하고 연구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단 이유에서다. 다만 일각에선 이전부터 이어져 온 악습을 지금이라도 끊기 위해 정부 사업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연총 “졸속 R&D 예산 삭감 중단하라”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연총)는 21일 ‘연구 현장을 뒤흔드는 졸속 R&D 예산 삭감을 당장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엔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연총 박사급 연구자 2,600명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연구자 의견을 집약한 내용이 담겼다. 연총은 “충분한 방향성과 전략적 검토 없이 졸속 추진되는 국가 R&D 예산 전면 재검토와 삭감은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연구 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일방적인 예산 전면 재검토와 삭감 시도를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구비 카르텔’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와 내용을 밝히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 갈라먹기식 R&D는 원점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R&D 국제협력은 세계적 수준의 공동 연구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연총은 “국제 공동연구를 늘리라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며칠새 국제 공동연구를 급조하는 불통의 정책을 중단하라”며 “선진기술 도입이나 상호 기술협력과 같은 명확한 목적하에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국제 공동연구를 추진하라”고 일갈했다.

정부 차원의 과도한 규제와 간섭에 대해선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연구 환경이 피폐해진 데엔 과도한 규제를 일삼은 정부의 책임이 짙다는 주장이다. “체계적이고 중장기적 정부 정책에 따른 과학기술 진흥 육성 관점에서 출연연 연구환경을 조성하라”며 “작금의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상황은 연구환경을 급격히 악화시키고 연구몰입환경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가 지난해 7월 6일 대전 대덕테크비즈센터(TBC)에서 ‘대법원의 임금피크제 판결에 따른 대응방안’에 대한 제1회 콜로키움을 개최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

“정부 사업 적극적으로 임해야, 카르텔 없애자”

다만 연구현장 일각에선 악습을 근절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재검토 사업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학자 A씨는 편협한 과학기술 정책의 원인으로 카르텔을 꼽았다. 특정 대학 출신이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해 연구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 대학 중심으로 과제가 선정되는 것도 카르텔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개발 성공률이 99%인 것도 이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패할 수 있는 연구 과제’가 선정되질 못하니 도전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해 우리나라의 연구 실적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을 핑계로 참석하지도 않은 외부인을 넣어 회의비를 부풀리는 경우도 카르텔로 봤다. 대학 교수 B씨는 “기득권 중에는 학생 인건비, 연구수당은 안 주면서 회의비 부정 사용에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며 “걸리지 않으면 된다는 인식, 걸려도 경고 수준일거라면서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 부정이 만연하다. 이런 도덕적 해이는 각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pixabay

권력 쥔 비전문가에, 과학계는 ‘울상’

평가자, 예산 배정자의 전문성과 카르텔의 연관성에 대한 볼멘소리도 나왔다. 한 국립대 교수는 “평가 결과를 보면 전문성을 갖췄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데, 상당수가 비전문가”라며 “평가자 풀이 좁다 보니 유사 연구 과제가 반복 선정되고 결국 연구의 질이 하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카르텔 형성으로 인해 전문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전문가가 들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연구원은 “비전문가에게 전문가가 과학에 대해 계속 설명해도 바뀌지 않는 게 우리 과학계의 현실”이라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실제 현장 연구자들은 기초과학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기술 주무 부처 및 예산 배정자의 비전문성에 심각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기초과학의 특성상 정책 추진 및 예산 편성 과제 선정엔 전문적 식견이 필요한데, 비전문가가 관련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니 정책과 과제의 연속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연구에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성으로 승부를 내야 함에도 불구, 아이러니하게도 관련 예산 등 모든 권한은 행시 출신 비전문 사무관들이 갖고 있다.

과학기술계의 주무 부처라 할 수 있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인력 중 현장 연구소 경험을 한 과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기부에 따르면 과학자 출신이라 할 만한 인력은 극소수 고위직뿐이다. 장관 및 정책자문위원,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등이 대표적으로, 사실 이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공(어쩌다 공무원), 즉 임시직이다. 오래 있지 않는단 의미다. 이들을 뒷받침하고 더 나아가 아이디어를 줘야 할 늘공(늘 공무원) 중 과학자 출신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과기부 운영지원과 인사팀에 따르면 이공계 박사 출신으로 특별 채용된 인원은 13명 정도로, 이들은 정책 방향성을 직접 진두지휘하지 않기에 큰 의미는 없다. 과학 현장을 이해할 만한 전문 인력의 투입이 시급하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지배하는 악순환을 이제는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