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파괴적 혁신, 벤처캐피탈의 종말 부를까?
챗GPT, 바드 등의 등장으로 생성형 AI에 대한 투자 확대 펀드레이징, 딜 소싱, 실사 등에 AI 기술 활용사례 늘어나 애널리스트 등 투자회사 기능을 AI가 대체할 가능성 제기
올해 생성형 AI가 모든 것을 혁신할 것이란 기대감이 확산되면서 VC(벤처캐피탈)들은 AI 프로젝트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투자에 특화된 AI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VC 업계 자체도 AI 도입에 따른 파급효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VC랩 ‘데실 베이스’ 등 투자 업계 전반에 AI 기술 도입
이달 초 VC랩은 벤처 캐피탈에 특화된 AI 툴 ‘데실 베이스(Decile Base)’를 출시했다. ‘투자자를 위한 챗GPT’를 표방하며 출시한 데실 베이스는 펀드레이징, 수수료 관리, 밸류에이션과 실사에 이르기까지 VC 운용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를 지원하는 지식 베이스의 AI 플랫폼 서비스다. 데실 베이스 이전에도 이미 금융산업은 AI와 뗄 수 없는 가까운 관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밸류체인의 모든 영역이 디지털화되는 추세인 데다 데이터 의존적인 금융산업의 특성이 반영되면서 로보어드바이저, 챗봇, 상품 추천, 이상거래 탐지, 신용평가와 여신 심사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AI 기술을 도입·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업 중에서도 특히 투자 업계는 대량의 디지털 데이터, 비용 효율화에 대한 회사의 니즈, 이미 널리 보급된 자동화·계량화된 매매방식 등으로 인해 로보어드바이저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AI 기술을 수용하고 있다.
VC의 일부 핵심 기능에 AI를 활용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분명하다. 거대언어모델(LLM)은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산더미처럼 쌓인 데이터를 선별 및 분류할 수 있다. AI 데이터 분석은 투자에 대한 새로운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딜 소싱과 실사를 간소화하면 투자자가 포트폴리오 기업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결정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AI의 사용범위가 확대되면 소규모 투자회사나 신생 VC들은 거대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소싱 능력을 확보해 경영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이는 VC 산업 전반을 평등하고 공정하게 민주화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점만 보면 AI 기술이 VC 업계에 이득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수많은 업무를 대체하듯이 VC의 기능 자체를 대체하는 데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생성형 AI는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VC들은 수년 전부터 딜 소싱과 관련해 특화된 기술을 도입해 왔다. 일례로 EQT 벤처스(EQT Ventures)는 지난 2016년에 이미 AI 플랫폼인 ‘마더브레인(Motherbrain)’을 출시했고, 시그널파이어(SignalFire)는 알고리즘을 통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분류·분석해 투자 기준에 맞는 스타트업을 선별하고 있다.
AI 기술 활용하면서 스타트업 인력구조·투자수요에도 변화
올해 초에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초기 스타트업 전문 VC인 NFX의 설립자 제임스 커리어(James Currier)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VC는 앞으로 10년이면 끝날 것”이라며 “AI가 스타트업 산업을 재편하고 투자 업계 전반의 효율성을 제고함에 따라 VC 부문의 종사자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셜 캐피탈(Social Capital)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차마스 팔리하피티야(Chamath Palihapitiya)도 ‘올인 팟캐스트’에 출연해 “VC는 자동화시스템으로 대체되면서 VC 업계의 애널리스트나 펀드매니저 같은 직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AI 기술이 확대되면서 스타트업의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팔리하피티야 CEO는 “앞으로는 AI가 스타트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면서 더 적은 인원으로도 운영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를 들어 차세대 소프트웨어 유니콘 기업이 영업, 고객 서비스, 심지어 코딩까지 대체하는 자동화된 워크플로우를 사용할 경우 3~5명 규모의 팀만으로도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VC의 투자를 유치한 풀사이드(Poolside)같은 스타트업들은 AI를 활용한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AI를 통해 스타트업 운영에 필요한 인력과 재원이 줄어들면 확보해야 할 투자금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게 되고, 나아가 VC에 대한 수요도 감소하게 된다. 즉 투자시장에서 자금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면서 현재 운영되는 수천 곳의 VC 중 다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살아남은 VC들의 규모가 더욱 작아질 경우 실사, 딜 소싱, 지원 업무 등을 담당하는 애널리스트의 역할도 사라질 수도 있다. 이미 투자 업계에서는 AI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증명한 연구들이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지난 202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알고리즘을 통한 투자와 엔젤 투자자 255명의 수익률을 비교해 그 차이를 확인한 바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투자 알고리즘 수익률은 7.26%인 데 반해 엔젤 투자자의 수익률은 2.5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은 투자 알고리즘보다 노련한 엔젤 투자자의 수익률 높아
많은 사람들이 머지 않은 미래에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VC 업계도 이를 피해 가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일부 VC만이 생존에 성공하고 살아남는 투자회사들은 AI의 역량으로 활용해 최고의 성과를 낼 것으로 전망한다. 10년 후에는 창업자들이 사람 대신 챗GPT나 구글 바드(Bard)를 통해 자본을 유치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AI 기술이 VC 업계를 재편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인간 투자자들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언급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를 보면 투자 알고리즘의 수익률이 인간 투자자를 능가했지만, 경험이 많은 엔젤 투자자와 투자 알고리즘을 비교했을 때는 엔젤 투자자의 수익률이 22.75%로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 단계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대부분 데이터에 의존하는데 이 경우에는 AI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분석할 만한 데이터가 없고 때로는 아이디어가 전부인 시드와 초기단계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AI가 탐색하는 데 한계가 있다. 숫자를 넘어 파괴적인 아이디어의 잠재력을 찾아내는 능력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기술인 셈이다. 현재 겪고 있는 경기 침체와 같이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대해 AI가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더욱이 AI에게 투자에 대한 결정을 맡길 경우, 투자자들은 알고리즘의 동일한 신호에 의존하게 되고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집단심리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투자 업계 전반에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게리 겐슬러(Gary Gensler) 의장은 지난 7월 금융 시스템에 대한 AI의 영향에 대한 연설에서 “대부분의 AI 투자 모형은 유사한 데이터나 비슷한 로직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상호 연결성이 강화된 상황에서 AI 알고리즘이 투자자 간의 동조성을 강화해 집단심리를 조장하게 되면 금융위기에 대한 잠재적 위험성이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