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위축·운영 부실 ‘이중고’에 얼어붙은 VC 생태계, ‘손상차손 손질’이 자구책 될까
VC 업계 마중물 된 모태펀드, 정작 정부 '운영 실태'는 고금리·경제 불확실성 심화, 투자심리 위축에 흔들리는 업계 혹한기에 얼어붙은 시장, 출자 예산 삭감에 '속수무책'
중소벤처기업부가 모태펀드 자펀드의 감액(이하 손상차손) 규정을 대폭 손질한다. 최근 벤처투자 혹한기로 벤처펀드에서 손상차손 처리된 피투자사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운용사(GP)인 벤처캐피탈(VC)들의 부담을 줄이고 후속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도모하겠단 방침이다.
모태펀드 운영 부실 가시화, 정부 책임론 ‘부상’
모태펀드 제도는 우리나라의 주요 스타트업 지원 정책 중 하나다. 모태펀드는 민간의 벤처 투자 활성화를 위한 재원으로, VC 등에 출자하면 VC는 이를 종잣돈 삼아 벤처 펀드를 만들어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다. 모태펀드는 국내 스타트업 투자 수요를 끌어내는 등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정부가 그간 모태펀드 운영을 제대로 해왔는지 여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일각에선 정부의 모태펀드 운영 부실 문제가 국내 벤처 투자 감소 요인으로 작용했단 비판도 나온다.
실제 지난 2022년에는 모태펀드의 자펀드 결성 시한을 준수하지 못한 자펀드 비중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여기서 자펀드는 모태펀드의 출자를 받은 펀드를 뜻하는 말로, 통상 정부는 모태펀드를 투입해 민간이 벤처에 투자할 펀드의 조성(자펀드)을 돕는다. 모태펀드는 정부의 ‘벤처투자모태조합 운용지침’에 따라 자펀드의 결성 시한을 운용사 선정일로부터 3개월 이내로 하는데, 모태펀드 업무를 맡는 공공기관 한국벤처투자가 운용사의 부득이한 사유로 시한 연장의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 3개월 이내로 연장할 수 있다. 운용사가 추가로 부득이한 사유가 생기면 중기부 장관 및 해당 계정 소관기관과 협의해 추가로 유예기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2020~2022년 3년간 운용사 선정 후 자펀드 결성까지 소요 기간을 보면 2차 결성 시한 지키지 못한 자펀드 비중이 2020년 9.5%에서 2022년 21.2%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벤처투자는 “2022년 고금리 기조에 따른 안전자산 선호, 회수시장 침체 등으로 민간 출자자 모집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자펀드 결성이 지연되면 민간 자금 공급이 늦어져 모태펀드 사업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일부 자펀드의 투자 집행률이 떨어진 것도 주요 지적 대상이다. 모태펀드 사업의 목적인 창업·벤처기업 등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달성하기 위해선 자펀드의 투자가 활발해야 하지만, 최근 3년간 조성된 자펀드의 투자집행 실적을 보면 자펀드의 투자 소진율은 2020년 결성 규모의 73.0%, 2021년 결성 규모의 47.6%, 2022년 결성 규모의 8.0% 정도에 불과했다. 미투자금액(결성액 기준)으로 보면 2020년 1조1,844억원, 2021년 2조2,917억원, 2022년 2조8,720억원에 달한다. 한국벤처투자는 국회에 “2022년의 경우 고금리 및 경제 불확실성 등으로 벤처 업계의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돼 전반적으로 투자집행이 보수적인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중기부, 손상차손 가이드라인 개정 시행
운영 부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기부는 ‘모태펀드 자조합 손상차손 가이드라인’ 개정을 띄웠다. 이번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손상차손 환입이다. 여기서 손상차손이란 당해 자산의 가치감소가 회복하기 어려운 경우 당해 자산가액을 감액해 당기손실로 인식하는 것이며, 손상차손 환입은 완전 자본잠식 등을 이유로 회계장부상 손상차손 처리된 피투자기업의 가치를 재산정해 반영하는 걸 뜻한다. 손상차손 환입이 중요한 이유는 벤처펀드 GP들의 관리보수 산정 기준 때문이다. 모태펀드 운용사인 한국벤처투자는 GP가 펀드를 운영하면서 가져가는 관리보수를 투자잔액을 기준으로 산정한다. 예컨대 펀드 결성액 200억원, 투자잔액 100억원, 관리보수율 2%를 가정했을 때 GP는 연간 2억원을 관리보수로 수취한다. 투자잔액이란 펀드를 통해 투자 집행된 금액을 의미한다.
문제는 피투자기업이 △영업정지 △완전 자본잠식 △3개월 이상 임금체불 등 손상사건이 발생했을 경우다. 이때 GP는 투자잔액에서 해당 피투자기업에 대한 투자금을 손상차손해야 한다. 그만큼 투자잔액은 줄어들고 GP가 가져갈 수 있는 관리보수도 줄어든다. 이후 손상사건이 해결되면 GP는 해당 피투자사에 대한 투자금을 다시 투자잔액으로 환입할 수 있다. 완전 자본잠식 상태의 경우 후속투자로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나면 환입 가능하다. 그러나 기존 환입금액 산정기준으로는 이전과 같은 투자잔액을 회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존 환입금액 산정기준은 순자산가치에 지분율을 곱한 금액이다. 반면 이번 개정안에서는 후속투자 단가를 반영했다. 후속투자 단가에 주식 수를 곱한 금액을 환입금액으로 할 수 있단 것이다.
후속투자 기대하는 정부, 현장선 “글쎄”
중기부 관계자는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기술력은 있지만 사업화가 어려워 완전 자본잠식에 빠진 기업들의 후속투자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들은 감액규정 개선만으로 벤처 생태계가 회복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애초 국내 VC 혹한기의 핵심 요인은 ‘출자 감소-재원 부족-시장 침체’의 삼중고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VC 업계에선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기)’가 재확산하고 있다. 시장에 풀리는 돈이 적은 가운데 수확해야 할 과실조차 제대로 영글지 못하면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등장한 케케묵은 슬로건이 오늘날 사회를 관통하는 단어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VC가 신규 투자한 금액은 전년 동기간 대비 32% 감소한 3조6,952억원에 그쳤다. 불과 2~3년 전 경쟁하듯 앞다퉈 투자 재원을 소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셈이다. 이렇듯 최근 들어 VC 생태계 내 투자금 부족 문제가 가시화하는 모양새다. 실제 지난해 신규 결성된 VC 펀드는 총 184개로 전년 동기(278개) 대비 33.8% 줄었고, 금액으로는 7조2,275억원에서 4조1,129억원으로 43.1% 급감했다.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하는 모태펀드 출자 규모를 크게 줄인 게 원인이다. 정부는 지난해 출자 예산을 전년 대비 40%, 2021년 대비 70% 삭감했다. 그나마 한국벤처투자가 뒤늦게 관리보수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등 투자 촉진책을 제시했지만 그것만으론 꽁꽁 얼어붙은 투자심리를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순 가이드라인 개정 외 다양한 시장 활성화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