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의 성장, 사모펀드에 유망한 투자 기회인가?
지난해 반도체 매출 5,200억 달러, 2030년에는 1조 달러 넘어서 사모펀드 운용사, 벤처캐피탈과 달리 뒤늦게 반도체 투자에 참여 반도체 생태계와 공급망 내 다양한 분야에 투자 가능성 살펴봐야
반도체는 거의 모든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핵심 부품으로, 세계적으로 시장 규모가 가장 큰 산업 중 하나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전문기업 딜로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산업 매출은 5,200억 달러(약 695조원)을 기록했으며 일각에서는 2030년 반도체 시장이 1조 달러(약 1,300조원)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아디안, 브룩필드 등 PE들 반도체 투자 확대
벤처캐피탈(VC)은 오랜 기간 반도체 관련 산업에 투자해 왔다. 글로벌 투자 전문 연구기관 피치북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VC의 투자액은 500억 달러(약 66조원)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사모펀드(PE)는 뒤늦게 반도체 산업의 대규모 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근 금융시장 전반에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는 가운데 유럽과 북미에서도 PE의 반도체 투자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10월 유럽계 PE 운용사 아디안(Ardian)은 유럽 내 반도체 밸류체인 기업에 대한 새로운 투자 전략을 발표했다. 아디안은 반도체 업계의 고위 임원들로 구성된 실리안 파트너스(Silian Partners)와 제휴를 맺고 반도체 산업의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아디안 반도체 이니셔티브’를 출범한 데 이어 이를 지원하기 위해 10억 유로(약 1조4,300억원) 이상을 모금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실리안 파트너스의 공동 설립자인 크리스토프 뒤베르네(Christophe Duverne) 전무이사는 “반도체 산업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며 “반도체는 디지털 경제와 녹색 전환의 핵심 산업이며 앞으로 10년간 이 두 가지 기조가 전 세계의 경제발전과 성장을 지배하는 주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미국 투자시장에서도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거래가 있었다. 지난 2022년 캐나다 소재 투자그룹인 브룩필드 자산운용(Brookfield Asset Management Inc.)은 인텔과 함께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반도체 공동투자 프로그램'(SCIP)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해당 계약에 따라 인텔과 브룩필드는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 소재 생산시설 건설을 위해 각각 150억 달러(약 19조9,000억원)씩 총 300억 달러(약 39조8,000억원)를 공동 투입했다.
글로벌 경영컨설팅 기업 알바레즈앤마살(Alvarez and Marsal)의 스콧 존스 상무이사는 “PE 운용사들이 반도체 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며 “반도체 수요 변동 사이클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진데다 새로운 기술이나 세그먼트가 개발되면서 투자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면서 반도체 투자 활성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주요국 정부가 공공부문의 참여를 확대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실제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등에서 반도체 생산시설을 자국 내로 유치하기 위한 정책과 자금을 마련해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美, EU 등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 위한 규제와 지원 강화
존스 상무이사의 설명대로 최근 반도체 산업과 관련한 각국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큰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반도체 리드타임이 급격히 늘어나면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은 코로나19 이전에는 통상적으로 3~6개월 수준이었지만 2021년 이후 계속 늘어나면서 지난 2022년에는 18~30개월을 기록했다. 반도체 시장에서 경기 순환 사이클의 압박은 반도체 생산이 얼마나 핵심 공급망에 집중돼 있으며, 또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고 있다. 근래 들어 반도체 공급의 병목 현상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는 하지만 미·중 갈등을 비롯한 지정학적 긴장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반도체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공급망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 의제로 남아 있다.
이에 지난 2022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설비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과 연구개발(R&D) 지원금 지급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과학법(the CHIPS and Science Act, CHIPS)을 도입했다.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69조원) 규모의 예산이 투입되며 이 중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 지원하는 보조금으로는 390억 달러(약 50조원)가 편성됐다. 이듬해인 2023년 9월에는 유럽연합(EU)이 유럽 내 반도체 혁신과 생산 역량 강화를 위해 총 430억 유로(약 62조원) 규모의 투자하는 유럽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을 발효했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는 핵심 공급처는 동아시아에 몰려 있다. 최첨단 반도체의 경우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TSMC가 반도체 매출 세계 1위에 오른 가운데 미국 기업인 인텔도 점유율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과 EU는 이미 동아시아 기업들의 첨단 제조시설 건설과 투자 유치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삼성은 2년 전부터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2조원)을 투입해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120억 달러(약 17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두 곳을 건설 중이며 지난해 8월에는 독일 자동차 부품업체 보쉬, 반도체 기업 인피니온, 네덜란드의 NXP 등과 함께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독일 드레스덴 반도체 공장 건설에 지분 70%를 투자했다. 한때 반도체 시장을 지배했던 인텔도 미국 애리조나주에 2곳, 오하이오주에 2곳, 총 4곳을 직접 건설하고 독일 마르데부르크 반도체 공장에는 300억유로(약 42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최첨단 반도체는 인공지능(AI), 5G·6G 통신 네트워크, 스마트그리드 등 하이테크의 핵심 생산요소지만, 반도체 생산공장 건설에는 수십억 달러가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계, 건설, 운영, 유지보수 등 모든 단계에 고급 기술과 정밀한 공정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프로젝트다. 실제 앞서 언급한 요인들로 인해 삼성과 TSMC는 일정 지연, 비용 증가 등 신규 공장 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이 반도체 시장의 기술 수요와 가격이 여전히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PE들은 투자에 신중한 모습이다. 지난 2022년 브룩필드와 인텔의 합작 투자와 같은 대형 거래가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례는 소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공급망 내 중견기업, 반도체 설계 등에서 투자기회 확보
이런 상황에서 PE 운용사들은 반도체 제조기업에 대한 직접 투자보다는 광범위한 반도체 공급망에서 주요한 투자 기회를 확보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뒤베르네 전무이사는 “반도체 산업은 여러 부문의 기업, 기술, 시장과 이해관계자들이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생태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산업의 하위 시장이나 주요 반도체 기업의 공급망에는 수많은 중견기업이 있고 우리는 바로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며 “앞으로 흥미로운 투자 성공 사례를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로서는 PE가 중견·중소기업에 투자하기 위한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 투자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 아디안의 이사회 임원인 티볼트 바스킨(Thibault Basquin)은 “반도체 시장의 중견·중소기업에 대한 커버리지가 부족하다”며 “중견·중소기업들은 스타트업과 달리 VC로부터 충분한 투자를 유치하기도 어렵고, 대기업과 달리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기회도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럼에도 반도체 내 기술적·물리적 구성 요소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아키텍처를 개발하는 혁신 기업들 중 일부는 VC가 투자 당시 기대했던 성과 수준을 넘어서며 성장하고 있다.
또한 반도체 생산에는 수많은 재료와 공정이 필요하며 공급망 안에는 수천 개의 이해관계자가 존재한다. 글로벌 세무법인 알바레즈앤마샬의 크리스 랜먼(Chris Lanman) 상무이사는 “미국의 경우 반도체 웨이퍼 생산에 사용하는 광물, 화학약품, 특수가스 등 재료의 70%를 아시아 국가로부터 수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PE 운용사는 현지화된 공급업체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기도 한다”며 “이러한 투자는 성장 궤적이 느릴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산업의 하위시장에서 PE들은 선호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전략을 활용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우베 램브렛(Uwe Lanbrette) 딜로이트 파트너는 반도체 설계 부문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반도체 설계하우스가 있다”며 “PE들은 소규모 클라우드 업체를 인수한 후 기업가치를 높여 매각했던 방식처럼 반도체 설계 부문에서도 같은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설계하우스는 자산이 적은 소프트웨어 중심 기업으로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지 않고도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PE 운용사들에는 더 이상 집중적인 R&D가 필요하지 않고 이미 수요가 확인된 레거시 반도체 기술이 가장 매력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자동차 같은 하드웨어 분야는 물론 항공우주산업이나 방위산업 등이 향후 반도체의 수요처가 될 가능성도 있다. 마이클 창(Michael Chang) 알바레즈앤마샬 상무이사는 “PE의 입장에서는 반도체 수요의 안정화가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라며 “10년 전에는 휴대폰 같이 더 작고, 더 빠르고, 더 강력한 제품을 제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반도체 산업의 첨단 기술이 사용됐다면 이제는 토스터 같은 평범한 가전제품부터 자동차, 산업용 기계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에 이같은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 때문에 이미 R&D가 완료된 첨단 신기술을 적용해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은 앞으로 수년 동안 무리 없이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부연했다.
전문인력 양성 교육・훈련, 예상치 못한 투자기회 될 수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잠재해 있을 수도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생산공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제조시설을 청소하기 위해 고용된 근로자에게도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미국과 유럽은 반도체 산업의 확장을 위해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애리조나주에 위치한 TSMC 공장의 가동이 당초 계획보다 지연된 것도 숙련 노동자의 부족이 원인이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오는 2030년까지 6만7,000명의 산업 인력 부족에 허덕일 것으로 전망한다. 정부와 기업이 미국 내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전 인력 부족으로 한계에 직면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에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인텔과 파트너십을 맺고 반도체 제조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훈련 부문에 1,000만 달러(약 14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삼성 등도 현지 대학과 협약을 체결하고 미국 내 반도체 인재 확보를 위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 인력 확보를 위한 이민법 변경’을 언급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향후 몇 년간 미국이 세계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반도체 인재 블랙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알바레즈앤마샬의 존스 상무이사는 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력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숙련된 노동력을 어떻게 충분히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그동안 회사 경영진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가장 큰 우려 중 하나”라며 “숙련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분야도 PE에는 큰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과 관련한 잠재적인 투자 기회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PE 운용사들 본격적으로 투자에 뛰어들기 전에 반도체 산업이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임을 고려해야 한다. 아디안의 티볼트 이사는 “반도체는 틈새산업이 아니라 수조 달러 규모의 글로벌 시장으로 성장할 산업”이라며 “PE 등 투자자들은 반도체 산업과 밸류체인에 대한 이해와 공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과거에는 반도체가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자동차 등 소비자 애플리케이션과 제품들에 집중됐기 때문에 경기순환 사이클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현재는 시장 상황이 15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며 “반도체가 시장에서 최종 재화로 전환하면서 안정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PE 운용사들에는 유망한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어 원문 기사는 Are semiconductors ripe for PE investment? | PitchBook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