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나서는 인텔, 파운드리 사업 분사하고 공장 건설 중단
인텔, 2분기 16억 달러의 대규모 적자
파운드리 사업부, 독립 자회사로 전환
독일·폴란드·말레이 공장 건설도 중단
창립 56년 만에 최악의 실적 부진에 빠진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사하기로 했다. 또 1만5,000명 규모의 인력 감축에 이어 독일, 폴란드, 말레이시아 등에서 진행 중인 공장 건설 프로젝트도 폐기하거나 잠정 중단할 계획이다. 2021년부터 ‘파운드리 재건’에 나선 인텔은 ‘삼성전자를 제치고 파운드리 업계 2위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3년 만에 막대한 손실을 보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겔싱어 CEO, ‘사상 최악의 위기’에 구조조정 방안 발표
16일(이하 현지시각)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전 임직원에게 보낸 메일을 통해 반도체 제조와 설계 사업의 분리를 골자로 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사상 최악의 실적 부진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다. 인텔은 2분기 16억 달러(약 2조1,300억원)라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2분기 실적 발표가 있던 지난달 30일 블룸버그통신은 “인텔이 실적 악화를 개선하기 위한 구조조정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여기에는 설계와 제조 사업의 분할, 제조 시설 확장 프로젝트 폐기, 파운드리 사업부의 분리 혹은 매각, 기타 사업의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방안이 포함됐다”고 전한 바 있다.
이번 조치에 따라 파운드리 사업부는 회사 내부의 독립 자회사로 운영되며 주요 임원도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 사외 이사를 영입해 운영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조직을 강화할 예정이다. 겔싱어 CEO는 “올해 초부터 회계기준의 분리를 시작으로 파운드리(제조)와 프로덕트(설계) 그룹의 분리 작업을 시작했다”며 “파운드리 자회사에 명확한 독립성을 부여해 고객 우려를 불식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별로 외부 자금 조달 가능성을 높이고, 재무구조를 최적화해 주주가치 창출에 도모하겠다”고 강조했다.
인텔에 따르면 이미 프로덕트와 파운드리 그룹은 ERP(전사적자원관리)를 분리한 상태로 올해부터 파운드리 사업부의 재무 실적을 별도로 발표해 왔다. 겔싱어 CEO는 “올해 초부터 ‘IDM(종합반도체기업) 2.0’ 전략의 마지막 단계로 조직 개편을 진행 중”이라며 “이번 구조조정을 통해 프로덕트와 파운드리 그룹 간 분리 작업이 완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시장에서 제기돼 온 파운드리 사업부 매각설에 대해서는 “설계와 제조에 걸친 인텔의 역량은 경쟁력을 갖춘 차별화의 원천”이라고 강조하며 현 단계에서는 매각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인력 15% 감원·사무실 규모 축소 등 자본 효율화 추진
인텔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독일 마그데부르크와 폴란드 브로츠와프 등에서 진행 중인 반도체 생산시설 건설도 연기할 예정이다. 지난해 인텔은 1.5나노급 공정을 도입해 독일을 유럽의 첨단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마그데부르크에 공장 건설을 추진해 왔다. 해당 프로젝트에는 300억 유로(약 44조4,000억원)가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재정난에 결국 1년 만에 계획이 무산됐다.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 건설 프로젝트도 2년가량 중단하기로 했다.
조직 개편과 함께 사무실 규모도 올해 안에 3분의 2로 줄일 예정이다. 이에 대해 겔싱어 CEO는 “자본 효율성이 높지 않은 소규모 팀을 정리하고 중앙 집중화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며 “이는 더 효율적이고 심플하고 운영 속도가 빠른 인텔을 구축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인텔은 직원의 15%에 달하는 1만5,000명을 감원하는 것과 동시에, 4분기에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고 연간 자본 지출도 20% 이상 줄이기로 했다.
다만 투자 운용사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와 합작사를 설립해 추진 중인 아일랜드 레이슬립 공장 건설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아울러 애리조나, 오리건, 뉴멕시코, 오하이오 등 미국 내에 건설 중인 신규 반도체 생산시설도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해당 시설들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에 따라 건설 진척 상황에 따라 순차적으로 보조금을 지급받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애리조나 등 4개 주에서 공장을 신축하는 인텔에 최대 85억 달러의 직접 지원금과 110억 달러(약 14조6,300억원)의 대출 상품을 제공하는 데 잠정 합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건립 중인 반도체 패키징 시설은 계획대로 건설하되 가동 시점을 조절하기로 했다. 인텔의 말레이시아 공장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에 쓰이는 첨단 반도체 생산을 목표로 70억 달러(약 9조5,000억원)가 투입될 예정이다.
WSJ 등 “실적 부진 벗어나려면 보다 과감한 조치 필요”
이처럼 인텔은 실적 부진과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사업 프로젝트와 조직, 인력에 대한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펼치고 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16일 WSJ은 “여러 분석가와 투자자들은 인텔에 파운드리를 분리·매각하는 방안을 권장하고 있다”며 “현재 인텔이 내놓은 구조조정안은 그 수준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인텔이 직면한 여러 문제가 일시적 위기에 그치지 않고 회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8일 블룸버그는 “인텔은 수십 년째 세계 반도체 산업을 지배하던 기업이지만 현재는 여러 재앙이 겹치면서 명운을 걸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며 “수십억 달러 규모의 신공장 건설 프로젝트 철회, 자회사 매각과 파운드리 사업 분사 등 현재 내놓은 방안보다 강도가 더 높은 조치가 필요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인텔의 위기를 부른 가장 큰 원인으로는 겔싱어 CEO의 무리한 사업 추진이 꼽힌다. 2021년 취임한 겔싱어 CEO는 인텔의 선두 회복을 위해 야심 찬 목표를 제시했다. PC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에서 확보한 설계 경쟁력을 토대로 엔비디아, AMD 등 경쟁사에 맞서는 한편 반도체 미세공정 제조 기술에서도 1위에 오르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인텔이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기도 전에 경쟁사를 지나치게 의식해 무리한 목표를 앞세웠다는 시각이 많다. 미세공정 개발 시간을 삼성전자와 TSMC의 절반 수준으로 단축하겠다는 목표가 대표적이다. 결국 기술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목표 설정은 연구개발(R&D)과 시설 투자 비용의 증가로 이어졌고 반도체 제조 사업에서 아직 뚜렷한 매출처를 발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어진 막대한 투자로 자금 여력이 크게 부족해졌다. 인텔이 자율주행 반도체나 AI에 핵심인 프로그래머블(FPGA) 반도체와 같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업의 매각까지 검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