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 3분기 61억 달러 적자, 항공기 결함·파업 직격탄
팬데믹 전 항공기 추락사고 이어 올해도 안전사고 발생
한 달간 총파업으로 일부 항공기 생산 중단해 매출 감소
올해만 누적 손실액 80억 달러, 당분간 회복 어려울 듯
세계 1위 항공사 보잉이 안전성 논란에 이어 한 달 넘게 지속된 파업으로 결국 대규모 분기 손실을 기록했다. 파업으로 인해 상업 항공기의 제작이 전면 중단되면서 매출 비중이 큰 737맥스, 767기 등의 출하량이 급격히 떨어진 데다 현금 소모가 커지면서 영업현금흐름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보잉은 향후 3년간 신규 채권과 주식 발행을 통해 현금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손실분을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누적 손실 80억 달러, 팬데믹 이후 최대 규모
23일(현지 시각) 보잉은 올해 3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61억7,000만 달러(약 8조5,00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8년부터 적자를 이어온 보잉은 올해 들어 누적된 손실이 80억 달러(약 11조원)에 달한다. 조정 주당 손실은 10.44달러로 월가가 예상한 10.35달러를 상회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생산이 중단됐던 2020년 이후 최대 규모다. 부문별로 보면 상업 항공기 부문에서의 영업손실이 직전 분기 5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확대됐고, 방위·안보·우주 부문에서의 손실도 23억8,000만 달러(약 3조2,900억원)를 기록했다.
3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 감소한 178억 달러(약 24조5,500억원)로 지난주 예비 실적 발표에서 공개한 수치와 비슷하며, 월스트리트 저널리스트들이 내놓은 예상치와도 부합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실질적인 현금흐름이다. 3분기 영업현금흐름은 항공기 출하량 감소로 현금 증발하면서 마이너스(-) 13억4,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앞서 지난 2분기 보잉은 100억 달러 규모의 신규 채권을 발행해 영업현금흐름을 보완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부채가 579억 달러(약 79조8,500억원)로 증가하면서 3분기 현금흐름의 압박이 심해진 탓이다.
보잉은 이와 관련해 “상업용 와이드바디 항공기 인도량 감소, 노조의 작업 중단 등의 요인이 3분기 현금흐름에 반영됐다”며 “올해 4분기에 더 많은 현금을 소진해 내년 하반기가 돼야 현금 흐름이 플러스로 돌아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잉은 3분기 말 기준 105억 달러의 현금과 유가증권, 5,400여대의 상용기를 포함해 총 5,110억 달러(약 704조7,200억원)의 수주 잔고를 보유하고 있다. 이에 보잉은 열흘 전 유동성 문제 해결책으로 2분기에 이어 추가로 250억 달러의 주식과 채권 신규 발행 계획을 투자자들에게 알린 바 있다.
보잉 CEO “자산 매각·조직문화 개선 등 주력”
이날 켈리 오트버그 보잉 최고경영자(CEO)는 민간 항공기 제작과 핵심 방위 부문에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인력을 축소하면서 일부 자산을 매각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회사에 근본적인 문화 변화가 필요하다”며 “우선순위를 재설정하고 더 간결하고 집중력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모든 사람의 최우선 관심사는 파업을 끝내는 것”이라며 “회사에 적합하고 직원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해결책을 찾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잉은 한 달 전부터 3만3,000명의 직원들이 파업하면서 737맥스, 767기 등 상업 항공기 제작이 전면 중단된 상태다. 사측이 임금 25%를 인상하는 내용의 합의안을 제시했지만, 노조는 지난달 13일 사측의 1차 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킨 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 만에 파업에 돌입했다. 노조는 이날 향후 4년에 걸쳐 임금 35% 인상을 골자로 하는 사측의 2차 제시안을 두고 투표를 진행하는데 이마저 통과하지 않을 경우 생산 차질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에 대해 S&P 글로벌 레이팅스 등 신용평가사들은 “파업으로 인해 주력 모델인 737을 비롯한 대부분의 항공기 생산이 중단되면서 한 달에 1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며 “파업이 계속되면 보잉의 신용등급을 정크(투자부적격) 등급으로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2차안이 통과돼 파업이 종료되더라도 당장 항공기 생산을 재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보잉의 파업으로 일부 협력업체들이 휴업에 들어가거나 투자를 연기했기 때문에 이를 정상화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지적이다.
기술 중심에서 실적·주가 중심으로 전환이 패착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보잉의 위기가 경영 실패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보잉의 대표작인 737의 성공은 효율적인 설계 덕분이었다. 33 배열의 이기장 시스템을 도입해 항공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저가 항공시장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항공기 중 하나로 한 때 항공산업을 주도했다. 누적 탑승객 수 300억 명이라는 기록을 세운 보잉 737은 1.5초마다 활주로에서 이착륙할 정도로 많은 항공사들이 선택한 기종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보잉이 엔지니어 중심의 회사에서 경영진 주도형 회사로 전환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결국 보잉은 737의 기술적인 결함을 개선하기보다는 비용 절감과 주가 상승을 우선시한 경영 전략으로 큰 대가를 치르게 됐다. 특히 보잉 737의 추락은 2018년 인도네시아와 2019년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큰 타격을 입었다. 2건 모두 소프트웨어의 문제로 발생했는데 보잉의 경영진이 당시 새롭게 적용한 카스라 시스템의 위험성을 숨기면서 항공사들이 충분한 준비 없이 해당 기술을 도입하게 만든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두 차례의 추락 사고 이후 보잉의 신뢰도는 급격히 하락했고, 전 세계 항공사들은 보잉 737 맥스의 운항을 중단했다.
이후 보잉은 CEO를 교체하는 등 쇄신 노력을 기울였지만, 올해 들어서도 안전사고가 계속되며 또다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지난 1월 보잉 737 맥스 여객기가 5,000m 상공을 비행하던 중 창문과 벽체 일부가 뜯겨 나가면서 비상 착륙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의 조사 결과, 비행기 조립 시 문을 고정하는 볼트 4개가 빠진 것으로 파악됐다. 이뿐만 아니라 이륙 준비 중이던 비행기의 앞바퀴가 떨어져 나가고, 객실에서 연기가 감지돼 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 4월에는 보잉 737-800 여객기가 이륙 도중 엔진 덮개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해 회항하기도 했다.
에어버스에 추월당한 보잉, 中 코맥 추격도 만만치 않아
보잉의 대혼란 속에 빠진 사이 후발주자인 에어버스가 매섭게 추격했다. 에어버스는 보잉의 독주를 막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합작해 1969년 설립한 회사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초만 해도 보잉의 시가총액이 에어버스의 2배를 넘었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주가가 하락하면서 현재는 에어버스의 시총이 보잉을 앞서고 있다. 지난해 에어버스의 신형 항공기 주문 대수도 2,319대로 직전 최대치였던 2014년 1,796대를 경신했다. 보잉의 판매량 1,456대보다 1.6배 큰 규모다. 올해 매출도 팬데믹 직전인 2019년 매출 704억 유로를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보잉과 에어버스의 1위 다툼을 지켜보던 다른 기업들도 이 틈을 노려 점유율 확보에 나섰다. 브라질 항공 기업 엠브라에르는 올해 8월 발표에서 2분기 상업용 항공기 인도량이 전년 동기 대비 12% 늘어난 19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에 첫 상업 운항에 성공한 중국의 중형 항공기 C919의 약진도 눈에 띈다. 보잉과 에어버스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중형 항공기 상용화에 성공한 중국상용항공기(COMAC·코맥)는 지난해부터 C919 주문을 받아 현재 누적 주문만 1,000대를 넘어섰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지난 2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잉 등 미국을 대표하는 전략 제조업체의 몰락은 미국이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력과 기술력으로 중국과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국가의 잠재적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내에서는 세계적 항공사인 보잉을 대체할 만한 기업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WSJ은 “보잉 등 미국의 대표 제조업체가 사라질 경우 업계 전반에 파장을 미칠 것”이라며 “특히 항공 사업의 주도권이 해외로 옮겨가고 자국의 산업 생태계가 붕괴되면 이를 돌이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