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조용한 사직 – ① 직원 사기 떨어뜨리는 필패 신드롬
경기 침체 심화에 구조조정 단행하는 벤처기업 늘어 자본 여유 부족한 벤처업계, 대부분 ‘눈치껏 알아서’ 떠나는 분위기 형성 강도 높은 감시·감독은 필패 신드롬으로 이어질 수도
금융 경색에 따른 경기 침체가 심화되는 조짐을 보이면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회사들이 크게 늘어났다. 회사마다 처한 사정이 다른 만큼 구조조정 진행 방식도 제각각이다.
애그테크 기업 그린랩스는 함수형 언어 기반의 개발팀을 구성해 이커머스에 도전한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경기 침체에 결국 개발 인력을 비롯한 이커머스 관련 인력을 대규모로 구조조정하는 중이다. 구조조정은 금융권과 유사하게 몇 개월 분의 퇴직금을 약속하면서 자진 퇴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린랩스의 경우는 신규 투자를 유지할 수 있었던데다 기존 업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였기 때문에 대기업 및 은행권과 비슷한 방식을 택할 수 있었던 반면, 일반 벤처기업들은 같은 선택을 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벤처기업을 떠나는 직원들과 내보내는 회사
자본 여유가 부족한 벤처기업들은 주먹구구식으로 이른바 ‘눈치’를 통해 업무 저성과자나 비주력 사업 관계자들에게 회사를 떠날 것을 종용하는 분위기다. 대부분의 벤처기업은 현금 보유량이 많지 않고, 애초에 해당 사업이 비주력 사업이 되는 주원인은 담당자들의 역량 부족으로 제때 성장하지 못한 것인 만큼, 벤처업계에선 해당 관계자들이 ‘눈치껏 알아서’ 책임지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라고 한다.
특히 작은 기업들의 특성상 업무 담당자가 많지 않아 업무 성과가 소수 담당자들의 역량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구조가 많아 동료들의 눈총을 받게 되고, 자칫 장기간 저성과 상태로 버티기에 들어갈 경우에는 벤처업계 전체에 빠르게 소문이 퍼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큰 도전을 하기 위해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던 직원들이 결과물 없이 회사를 떠나게 되는 점이 미안해 직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마무리하게 되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 직원들은 회사에 지분을 더 달라거나, 지분을 현금으로 바꿔 달라거나 하는 태도를 보여 ‘벤처기업 오면서 저런 것도 생각 못 했나?’라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엄격한 모니터링은 ‘필패 신드롬(Must-Fail Syndrome)’으로 이어져
저성과자가 회사를 떠나지 않을 경우 기업들이 취하는 또 하나의 전략은 강도 높은 감시·감독이다. 외부에 알려져 있는 대기업 사례처럼 복도에 책상을 내놓고 시키는 등 업무 이외에 다른 어떤 업무도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결과물이 어디까지 나왔나를 수시로 체크하면서 업무 담당자의 피로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문제는 색안경을 끼고 직원을 바라보며 사소한 부분에 문제점을 지적하게 되면 이른바 ‘필패 신드롬(Must-Fail Syndrome)’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사관리론에서는 감시·감독 강화가 필패 신드롬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를 막기 위해 업무 성과 평가를 숫자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게 공식화하는 것을 추천하지만, 인사 역량이 부족한 벤처기업에서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결국 떠나는 직원도 등을 돌리게 되고, 나가는 직원에 대한 회사 내부 인력의 평가도 급격히 나빠지게 된다.
조용한 사직과 필패 신드롬
최근 들어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관점으로 업무보다 ‘워라밸’을 찾는 이른바 ‘조용한 사직’ 경향이 크게 늘어난 탓에 기업들의 감시·감독이 한층 강화된 추세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면서 감시·감독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스타트업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한 스타트업 개발자가 “업무를 열심히 안 하고 있는 건 맞다”면서 “그런데 매일 작업량에 대해서 상세 보고서를 내라는 식으로 감독이 심해지니 일하기가 더 싫어진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같이 조용한 사직을 차단하기 위해 감시를 강화해도 정작 직원들은 상세 보고서를 쓰는 시간만큼 또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데다, 보고서에 대한 압박 때문에 결국 업무 성과는 더욱 저하되니 악순환만 반복된다.
역삼 일대의 시리즈 B 투자금을 받은 한 스타트업 대표는 “재택근무에 조용한 사직 트렌드가 생기면서 인재 채용이 더욱 힘들어졌다”는 하소연을 하며 “감시를 강화하면 업무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직 준비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필패 신드롬의 끝에는 채용 실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