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벤처 대출 콘퍼런스, SVB 이후 되려 투자자 적극성↑, 스타트업들은 유동성 확보에 골머리
10일 뉴욕서 벤처 대출 콘퍼런스 개최 투자자들 SVB 공백 메우며 적극적으로 시장에 뛰어들 의지 보여 스타트업들은 유동성 확보 위해 악조건의 벤처 대출도 받아들이는 분위기 국내는 정부 주도로만 진행, 해외 VC 투자 스타트업은 제외 조건에 실망한 곳도 많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벤처 대출 모델이 타 금융기관에서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미 연준의 빠른 금리 인상만 아니었으면 지분 희석을 불편해하는 벤처기업들과 고수익 투자처를 찾는 투자자들 양쪽의 수요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투자 방식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뉴욕에서는 ‘벤처 대출 콘퍼런스(Venture Debt Conference)’가 열려 SVB 파산 이후 벤처 대출 생태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토론이 진행됐다.
벤처 대출 모델, SVB 이후 되레 타 은행으로 확산
벤처 투자 관련 전문 분석기관인 피치북(PitchBook)에 따르면 이번 콘퍼런스 참석자들 대부분이 그간 SVB에서 사실상 독점적으로 운영해왔던 벤처 대출 모델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상장을 최대한 늦추고 지분 희석을 피하려는 욕구가 강한 만큼 지분 투자보다 지분을 담보로 한 대출을 선호하고, 투자자들도 수익성이 나쁘지 않은 투자 방식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간 SVB에서 진행했던 벤처 대출 모델은 이미 투자를 받고 다음 투자를 준비 중인 스타트업들에게 과거 투자금의 50%를 대출해주고, 이를 다음 투자가 이뤄지고 난 다음에 상환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안정적으로 ‘투자-성장-재투자’ 공식이 돌아가던 시장에서는 위험 대비 수익성이 높은 투자 방식이었으나, 지난 2022년 미 연준이 급속히 긴축을 진행하면서 재투자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늘어난 후로는 위험 관리에 대해 각종 지적을 받은 투자 모델이다.
SVB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은 대체로 무리한 지분 투자보다 다음 투자를 담보로 한 대출이 여전히 향후 스타트업 투자에 작동 가능한 투자 모델이라는 의견을 냈다. SVB 사태로 유동성 확보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이미 확산되어 있는 만큼 더더욱 투자자들에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관측됐다.
소액 투자자들에게 유리한 시장으로 바뀌어
조기 상장, 매각 등의 가능성이 닫힌 시장이 되면서 투자 시장의 분위기도 바뀌는 추세다. 과거처럼 시리즈 C 이후 투자를 진행하면서 상장 시점을 타진하는 투자처는 상대적으로 외면받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시리즈 B 이전 단계 스타트업들에 대한 투자가 늘어났다. 대형 투자에는 함부로 뛰어들 수 없었던 소액 투자자들도 적극적으로 투자처를 모색하게 됐고, 더불어 벤처 대출 모델도 다시금 각광 받게 된 것이다.
이어 밸류에이션(기업가치 평가)도 스타트업들에 불리한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대비 적게는 10~20%, 많게는 30~40%까지 할인된 밸류에이션으로 투자에 들어가도 자금줄이 마른 스타트업들이 불만을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벤처 대출 모형에 대한 시선의 변화
과거 투자자들은 벤처 대출을 사모펀드 영업의 일부로 인식했다. 매각 및 상장 직전에 일시적으로 받는 투자금을 시장에서 상환받는다는 방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모펀드 투자보다 수익률도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장이 확대되고 벤처 대출이 일반화되면서 사모펀드만 뛰어들던 시장에 은행도 뛰어들게 됐다. SVB도 이런 모델 중 하나다. 이번 콘퍼런스 참석 패널 중 한 명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미 서부에서 벤처 대출 개념을 이해 못 하는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는데 진땀을 뺐던 콘퍼런스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며, 3년 사이에 벤처 대출에 대한 이해가 빠르게 확산됐다는 이야기를 내놨다. 수익률은 채권에 불과하면서 위험은 주식 수준인 자산을 구매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납득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SVB가 영업 실패가 아니라 자산 유동성 관리 실패로 파산 수순을 밟았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공백을 채워 넣으며 투자 기회를 노리는 투자자들이 크게 늘었다고 부연했다.
이어 2년 전에 대규모 투자를 받았던 스타트업들이 2023년 하반기를 거치며 자금이 다 소진될 경우 벤처 대출 모형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SVB의 공백을 메워 넣을 수 있는 투자자들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투자자 친화적인 시장, 수익성 안 나는 스타트업들 결국 비호의적 조건 감수할 것
올해 3, 4분기 들어 시장이 더 악화될 것에 대비해 미리 투자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스타트업 관계자도 있었다. 미 연준이 올 하반기까지 이자율을 소폭 하락 혹은 유지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잠재우려고 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하반기에 수익성 안 나는 스타트업들과 경쟁하기보다 좀 더 이른 시점에 투자를 받는 것이 더 적절한 시장 대응책이라는 의견이다.
이어 기업가치 평가에서도 과거와 달리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조건이 돌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황기에는 입으로 전해지는 가치를 믿고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투자자 친화적인 시장이 되면서 기업가치를 꼼꼼하게 평가하기 위해 각종 정보를 요구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 콘퍼런스 참석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스타트업들에 대한 충고도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스타트업들은 대출이 가장 필요 없을 때 대출을 받아야 가장 저비용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관계자들은 12개월 미만의 ‘런웨이(Runway·투자금 소진 전까지 남은 기간)’에 닥친 스타트업이 벤처 대출을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아이러니하게도 투자금이 충분할 때 대출을 받아 런웨이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는 것이 현재 시장에서의 적절한 대응책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스타트업들이 유동성 확보에 벤처 대출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정부 주도로 벤처 대출 기금이 마련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21년 하반기에 시리즈 E 투자를 유치하며 6천억원대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은 한 스타트업 재무 관계자는 올 들어 정부의 벤처 대출을 타진하기 위해 중기부 관계자를 만났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국내 VC들에게 투자받은 경우에만 벤처 대출을 진행한다는 조건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유니콘으로 불리는 토스, 두나무, 컬리 등의 대부분의 대형 벤처기업들은 국내 VC 시장 규모 탓에 한국에서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들 유니콘들에게 정부의 벤처 대출 모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남의 집 잔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