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브 규제 도입하면 탈(脫)한국 러시 잡힐까?

중기부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 방안’ 발표, 핵심은 네거티브 규제 한국의 낡은 규제, 일론 머스크가 한국서 창업했다면 범법 회사로 찍혔을 것 세계 최고 혁신 클러스터 ‘랩 센트럴’에서 국내 스타트업 실증 가능해진다 결국 중요한 건 ‘속도’ 말로만 성찬 말고 제대로 된 성과 이뤄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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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 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33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 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네거티브 규제로, 신기술에 대한 규격이 없거나 현행 법령의 적용이 부적합해도 실증이 허용된다.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가 미래 산업 분야의 유니콘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나옴에 따라 정부가 금지된 것 빼곤 모두 허용되는 전면적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글로벌 혁신 특구는 현행 법령 및 제도가 신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발생하는 규제 지체를 극복하고 혁신 기업의 기술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는 최근 이어지고 있는 원화 약세와 수출 부진을 비롯해 미국 소형은행 붕괴가 불러온 경제 위기 등 3중고의 대외여건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혁신’뿐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고강도 규제 혁파가 선행돼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이영 중기부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서 “싸울 시간이 없다. 달리는 데 걸림돌이 되는 규제는 폭력에 가깝게 파괴해야 한다”며 “글로벌 혁신 특구를 통해 글로벌 기준과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규제는 과감하게 혁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기부 관계자는 “대학·연구소·글로벌 기업까지 참여하는 혁신 클러스터 형태로 올해 2~3곳을 시범 조성한 뒤 2027년까지 특구 총 10곳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자율주행차 학습 데이터, 테슬라처럼 자유 수집 가능해진다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를 위해서는 AI가 지속적으로 주행 환경을 학습해야 한다. 그러나 원본 영상을 그대로 학습시키는 것은 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는 소관 부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국내 자율주행 스타트업에서는 자동차 번호판이나 행인 얼굴 등을 일일이 블러 처리 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 개발에 매진해야 할 노동력과 시간을 엉뚱한 데 갈아 넣느라 중국이나 미국에 고객을 다 뺏길 판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일론 머스크가 한국에서 창업했다면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은커녕 범법 회사로 낙인찍혀 사업을 접어야 했을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혁신의 발목을 잡는 비식별화 조치 규정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AI의 성능이다. 한 자율주행차 업계 연구원은 “얼굴이 지워진 이미지를 토대로 불완전한 학습을 한 자율주행차가 인명사고를 낼 경우 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모호한 규제에 가로막혀 기술 개발 타이밍을 놓치는 건 국가적 손실”이라고 역설했다.

현재 미국의 경우 자율주행 기술과 관련해 법률이나 정책에서 금지한 행위가 아니면 허용하고, 데이터 관리에 문제가 생길 시 사업자에게 책임을 묻는 ‘네거티브 규제’를 택하고 있다. 즉 법에 따른 책임만 지면 원본 데이터를 활용한 실증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글로벌 혁신 특구 조성 방안에 따라 우리나라도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하는 만큼 앞으로 미래 모빌리티 혁신의 핵심인 자율주행차 관련 데이터를 테슬라처럼 자유롭게 수집하고 실증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낡은 규제 피해 ‘규제 이민’ 떠나는 혁신 기업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최근 들어 국내에 모기업을 두지 않고 처음부터 해외에서 창업하는 ‘본 글로벌(Born Global)’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창업한 회사가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플립(Flip)’도 크게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낡은 규제가 기업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플립의 대표적인 사례인 쿠팡도 미국 쿠팡LLC가 한국 쿠팡 지분의 100%를 소유하고 있는 구조다. 플립의 주된 이유는 정부 규제가 적고 해외 투자유치와 증시 상장, 인수합병(M&A) 등에 있어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가 지난해 국내 스타트업 256개사를 대상으로 ‘지속 성장과 애로 해소를 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 기업의 25.4%가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 답했다. 국내 규제로 기업 경영과 신기술 개발에 어려움을 겪느냐는 질문에서도 ‘그렇다’는 답변이 44.1%로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기업(22.3%)의 두 배를 상회했다. 이러한 뼈아픈 결과는 우리나라의 규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상자산 금융 서비스 국내 1위 업체인 ‘델리오’는 2022년 1월 미국 워싱턴 D.C에 지사(델리오US)를 설립한 데 이어 2년 내 본사를 옮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 규제로 인해 투자유치에 어려움이 있는 데다 벤처기업 인증이 안 돼 지원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상호 델리오 대표는 “각종 규제로 인해서 국내 블록체인 업체들이 한국에서 기업을 키우는 데 한계를 느끼는 분위기”라고 토로했다. 델리오는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할 경우 현지 채용을 늘리는 대신 국내 직원 중 50여 명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의 회장이 투자한 AI 솔루션 기업인 ‘뤼이드(Riiid)’는 국내 유니콘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이전을 추진 중이다. 한국은 빅테크 사업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반면, 미국은 규제 강도가 낮은 만큼 사업을 키우기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인공지능(AI) 기반 경기 영상 분석 기업인 비프로컴퍼니도 국내의 과도한 규제를 피해 영국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또한 국내 1세대 화장품 구독서비스 업체 미미박스와 기업용 채팅 메신저 스타트업 센드버드도 2014년 해외로 본사를 옮겼다.

창업 5년차 국내 스타트업 A대표는 “스타트업은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켜야 하는데 규제 심의가 느리다 보니 비즈니스 모델의 자유도가 높은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창업 7년차 B대표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과하더라도 가이드라인 안에서만 사업을 진행하라고 하기 때문에 사업의 확장성이 없어 신규 투자를 유치하는 것도 어렵다”고 역설했다.

이영 중기부 장관이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미국 UL솔루션(UL Solutions) 워싱턴 D.C. 본부에서 열린 ‘미래세대를 위한 신산업 분야 스타트업 기술 혁신 지원에 관한 업무협약’ 체결 행사에서 웨이팡 조우 UL솔루션 TIC 총괄 사장과 협약서에 서명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중소벤처기업부

중기부, 해외 실증 거점 조성해 기술 혁신 지원

창업 초기 국내 정책자금의 지원을 받은 유망 스타트업들의 잇따른 한국 탈출은 기술, 인재 유출은 물론 궁극적으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역대 정부마다 규제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혁신의 날개를 꺾는 척박한 환경은 변한 게 없었다. 심지어 미래 산업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첨단 분야의 싹을 밟는 규제 탓에 많은 스타트업이 고전을 면치 못한 채 질식당하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탈(脫)한국’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을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품질과 안전성을 테스트할 수 있는 충분한 실증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AI나 바이오 등 첨단 분야의 경우 소관 부처의 의견을 반영한 포지티브 방식으로 진행된 탓에 실증특례 자체가 어려웠다.

이에 정부는 국내에서는 실증이 허용되지 않는 첨단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외국에서도 실증을 거칠 수 있도록 해외 실증 거점을 조성했다. 먼저 미국의 글로벌 인증기관인 UL솔루션(UL Solutions)과 협력해 첨단 분야 스타트업의 미국 실증 및 기술 혁신을 지원한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 4월 대통령 미국 방문 당시 UL솔루션과 미래세대를 위한 스타트업 지원에 합의하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바 있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UL솔루션의 첨단 실증 인프라와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아 국내 스타트업의 기술 개발을 지원할 방침이다.

유전자 치료제 등 첨단 바이오테크 분야는 국제협력에 기반한 글로벌 제약사와의 협업 및 공동 연구를 지원한다. 지난달 29일 중기부는 인천시, 연세대와 함께 공동으로 조성하는 ‘K-바이오 랩허브’와 미국 보스턴의 ‘랩 센트럴(Lab-Central)’ 간 MOU를 체결했다. 랩 센트럴은 미국 생명과학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다. 보스턴 랩 센트럴은 ‘지구에서 가장 혁신적인 1 스퀘어마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세계 최고 클러스터로 손꼽히며 모더나, 다이나믹스 등 글로벌 기업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K-바이오 랩허브도 미국의 랩 센트럴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번 MOU를 바탕으로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보스턴 랩 센트럴에서 기술 실증을 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의 MOU에 이어 올해 안에 일본의 ‘쇼난바이오헬스이노베이션파크’와도 MOU를 체결해 한·미·일 바이오클러스터 협력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첨단 바이오 벤처·스타트업들이 글로벌 바이오 클러스터들과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스타트업의 무덤’, 뼈아픈 오명

2021년 기준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에 대한민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심지어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22년 국가별 유니콘기업 보유 순위에서 대한민국 유니콘 수는 11개로, 개발도상국인 브라질보다도 적다.

정부는 신산업 규제를 풀기로 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한발 앞서 신기술을 확보하고 사업화에 성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만큼, 가장 큰 문제는 속도에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규제를 푸는 속도가 새로운 기술 변화의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규제로 발목잡혀 있는 사이 해외 경쟁사들이 추월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문가 50명에게 정부의 규제 혁신 정책을 물은 설문조사에서도 ‘체감하기 어렵다’(45.5%), ‘속도가 더디다’(27.3%)는 평가가 많았다. 적기에 규제 혁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기술 혁명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때부터 규제 혁신을 외쳤지만 기업들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말로만 성찬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성과를 이뤄내, 한국은 ‘스타트업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씻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