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사우디 국부펀드 PIF, 논란의 투자 사례 분석 ④ 리브골프
1936년 나치 독일의 ‘베를린올림픽’ 개최부터 시작된 스포츠 워싱 전략 막강한 오일머니로 PGA 스타 플레이어 대거 빼낸 ‘리브골프’ 갑작스러운 리브골프와 PGA의 합병 소식, 사우디와 미국의 감춰진 속내는?
국부펀드란 중앙은행이 관리하는 외환보유고와 달리 정부가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투자용으로 출자해 만든 펀드로,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한국은행의 위탁자산을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가 국부펀드에 해당한다. 미국의 국부펀드·연기금 분석기관 글로벌 SWF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국부펀드 174개의 전체 자산규모는 11조3,580억 달러(약 1경6,000조원)다. 자산규모 순위 1위는 중국투자청(CIC)이 1조3,510억 달러(약1,785조원)로 전체의 11.9%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동지역 27개 국부펀드 자산규모는 4조1,400억 달러(약 5,422조원)로 글로벌 국부펀드 전체 자산의 36.5%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 PIF(공공투자펀드·Public Investment Fund)가 최근 무서운 속도로 글로벌 국부펀드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글로벌 SWF는 2030년 PIF가 노르웨이 국부펀드 다음으로 큰 규모인 2조30억 달러(약 2,642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 PIF의 총재인 알 루마얀은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의 오른팔로, 전문가들은 사실상 왕세자가 PIF의 돈줄을 쥐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인권탄압국 이미지 탈피를 위한 ‘스포츠 워싱’
이런 PIF가 최근 스포츠 변방국에서 글로벌 스포츠계의 ‘큰 손’으로 급부상하며 미국·유럽 중심의 주요 스포츠 판도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스포츠 대회 개최, 스포츠 구단 인수와 같이 천문학적 오일머니를 내세운 행보가 인권 탄압국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이른바 ‘스포츠워싱’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인권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스포츠를 활용한 사례는 대부분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에서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개최를 통해 세계 최초로 스포츠워싱 전략을 추진한 이래 수 많은 독재체제에서 이를 반복하고 있다. 오랜 시간 인권 논란에 휩싸여 온 카타르가 지난해 월드컵을 개최한 것도,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중국 정부가 마지막 성화 봉송주자로 신장위구르 자치구 출신 선수를 배치한 것도 모두 스포츠워싱의 일환이다.
골프계의 판도를 뒤흔든 ‘리브골프’의 출범
현재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스포츠워싱 사례는 지난해 6월 막강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한 사우디의 ‘리브골프(LIV Golf)’ 출범이다. 사우디는 왕세자가 실권을 잡은 이후 여성 운전을 허용하긴 했지만, 아직도 전반적인 여성 인권은 처참한 수준인 데다, 지난해 여성 운동가인 누라 빈트 사이드 알 까흐타니는 사우디의 여성 인권 향상을 촉구하는 내용의 트위터를 게재했단 이유로 무려 45년 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사우디 출신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까슈끄지 암살 사건을 빈 살만 왕세자가 지시했다는 정황이 밝혀져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인권 탄압국 명단에 중국, 북한과 함께 사우디도 포함돼 있다. 리브골프가 스포츠워싱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이유다.
리브골프는 PIF 지원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남성 골프 인비테이셔널 시리즈(Invitational Series)로, 월드스타 영입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그야말로 쏟아부으며 ‘오일머니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리브골프는 48명만 출전해 ‘컷오프(중간 탈락)’ 없이 스트로크로 3라운드(54홀)를 진행하고, 드래프트 방식으로 12개 팀(4인1조) 단체전을 소화한다. 지난 시즌 8개 대회 총 상금은 무려 2억5,500만 달러(약 3,363억원)로 PGA의 4배에 달하며, 심지어 3일간 24오버파로 꼴찌를 기록한 앤디 오글트리도 12만 달러(1억5,800만원)를 챙겼다. 컷오프가 없어 참가자 모두 상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선수가 18홀 각 코스에서 동시에 티오프를 하는 ‘샷 건’ 방식을 채택해 경기 시간을 줄이고 날씨와 같은 외부 영향을 공평하게 받도록 했다. 선수들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리브골프가 내세운 조건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스틴 존슨과 브라이슨 디샘보는 리브골프 합류 조건으로 2억 달러(약 2,639억원)의 이적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PGA투어(미국남자프로골프) 잔류를 택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무려 9억 달러(약 1조1,874억원)를 제시 받아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리브골프-PGA투어의 법적 공방
PGA의 탑랭커들이 잇달아 이탈하자 PGA는 이적한 17명의 선수에 대해 PGA의 전통과 명예를 심각히 훼손했다며 ‘PGA투어 대회 출전 정지’라는 초강수를 뒀다. PGA는 리브골프가 천문학적인 상금과 이적료를 무기로 PGA 소속 선수의 계약 파기를 유도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우디가 자국이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세탁하고 PIF의 ‘사우디 비전 2030’ 구상을 진전시키는 데 골프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 등 PGA소속 선수들도 리브골프로 이적한 선수들을 향해 ‘악마’, ‘배신자’라고 평가절하하며 비난에 동참했다.
이에 이적 선수들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지난해 10월 필 미켈슨을 비롯한 10명의 선수들은 PGA투어를 독점금지법(Anti-trust law) 위반으로 미 연방법원에 제소했다. 이들은 PGA가 개인의 직업 활동에 대한 자유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리브에서 막대한 상금과 계약금을 챙긴 선수들이 소송전까지 불사하는 이유는 ‘명예’ 때문이다. 세계 4대 메이저 대회인 PGA챔피언십, US오픈, 디오픈 챔피언십, 마스터즈의 챔피언 타이틀은 모든 프로골퍼가 꿈꾸는 최고의 명예다. 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은 단 2가지로, 메이저에서 우승하거나 공식세계랭킹(OWGR) 상위권에 오르는 길 뿐이다. 그러나 세계랭킹은 PGA투어 포인트로 산출되기 때문에 출전길이 막히면 아예 도전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리브골프-PGA투어 전격 합병
그런데 지난 6일(현지 시각)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며 날선 공방을 벌여온 양측은 공동성명을 통해 PIF와 PGA의 골프 관련 사업을 통합 법인으로 이관한다고 밝히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골프 종목을 글로벌 단위로 통합하기 위한 획기적 합의라는 것이 양측의 설명이다.
양측은 지금까지 제기됐던 각종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합의했으며 리브골프로 이적했던 선수들의 복귀 문제 등 세부 사항은 추후 협의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로써 PIF는 새로 출범하는 법인의 독점적 투자기관이 되며, 통합 법인의 CEO는 PGA의 커미셔너인 제이 모너핸이, 이사회장은 알 루마얀 PIF 총재가 맡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봤을 때는 리브골프가 PGA투어에 흡수 통합된 모양새지만 실상은 PGA투어가 사우디의 오일머니에 백기를 든 것이다. 양측의 합병 얘기가 처음 거론된 것은 지난 4월 말 모너핸 커미셔너와 알 루마얀 PIF 총재의 식사자리에서다. 두 사람은 식사와 라운드를 함께하며 논의를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스폰서 계약 및 TV 중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리브골프와 탑랭커들의 이탈로 인해 2부 투어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PGA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이들의 회동 이후 약 한 달간의 물밑협상 끝에 합병이 성사됐다.
일각에서는 이번 합병에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대립해 온 사우디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사우디를 방문한 날 공교롭게도 ‘골프 전쟁’이 종식됐기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PGA투어는 ‘미국의 자존심’이다. 그런 PGA가 고작 1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리브골프와 합병을 단행한 데에는 미중 패권전쟁 속에 사우디와의 동맹 강화는 물론 중동에서의 중국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려는 미국의 속셈이 숨어있다. ‘천문학적 오일머니의 승리’, ‘미국의 골프전쟁 참패’라는 굴욕적인 비판을 들으면서도 글로벌 스포츠계에 무서운 속도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사우디에 골프를 ‘선물’로 내민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번 합병은 사우디의 오일머니가 세계 스포츠계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사우디의 최근 행보는 석유 수출에 기반한 하드 파워에 이어 예술, 문화, 스포츠 등을 바탕에 둔 소프트 파워까지 확보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외신들은 빈 살만이 이미 충분한 실권을 행사하고 있으나,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사우디 국왕(88세)에게 왕권을 넘겨받는다면 이변이 없는 한 향후 50년 이상 사우디의 절대적 통치권자로 군림할 것이라 전망한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세계 자유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려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번 리브골프 사례를 통해 인권과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자본에, 그것도 권위주의의 자본 공세 앞에서 얼마나 작아질 수 있는가를 목도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