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Out] 한국에서 유니콘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
전경련, CVC 규제 풀어줘야 한국에서 유니콘 더 나올 수 있다? 업계 관계자들, 규모만 커져서는 일반 VC와 투자 행태 달라질 것 없어 유니콘 만들려면 정부 모태펀드 규제가 풀려야, CVC 규제는 후순위
2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이 정부의 CVC(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 규제 때문에 스타트업들이 유니콘(국내 기준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이 될 수 없다며 CVC 규제 철폐를 요청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규제 및 개입 탓에 유니콘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맞지만, CVC에 대한 규제 철폐가 유니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유니콘 스타트업들은 다들 해외 VC들 투자 받았는데?
도산대로 변의 한 VC 업체 전문심사역 S씨는 전경련의 보도에 대해 “해외 VC들은 유니콘 만들고, 국내 VC는 정부 모태펀드 받는 거밖에 생각 안 하는 곳들”이라며 CVC에 대한 규제 철폐가 유니콘 생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경련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내놨다. 이어 “정부 모태펀드를 받고 나면 투자 결정 속도, 결정 프로세스, 계약서 조건, 이후 보고서, 업무량 등등에서 엄청나게 부담이 많이 생기는 만큼, 오히려 정부 모태펀드를 안 받는 것이 유니콘 배출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실제로 쿠팡, 토스 등의 유니콘 스타트업들은 사업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해외 VC들을 유치한 반면, 국내의 법적 제약 등에 가로막혀 국내 VC들의 투자는 거의 받지 못했다. 정부 모태펀드 자금이 유입된 모 국내 VC를 비롯해 약 10개 투자사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던 한 스타트업 대표는 “시리즈 B 이후로는 국내 VC, 특히 정부 모태펀드를 받은 국내 VC와는 가능하면 엮이지 말자고 내부 합의가 있었다”며 “해외 VC는 의사 결정이 굉장히 빠르고, 스타트업에 대한 신뢰를 빠르게 쌓아올리는 반면, 국내 VC들은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하고, 정부가 압박하니까 투자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정부 요건을 안 맞출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게 눈에 보인다”고 답했다.
한국벤처투자가 공개한 각종 정부 모태펀드 자금에는 특정 사업 분야에 대한 투자 비율이 60%, 80% 등으로 제한돼 있는 데다, 세부 사항으로 스타트업 경영진의 역량 등에 대해 시장에서 납득할 수 없는 채점표까지 제시해야 한다. 모두 정부 관계자들이 투자 실패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한 ‘리스크 회피’ 전략에 맞춰 투자금이 집행되기 때문이다.
경험 없는 의사결정권자와 자문위원
삼성동 일대에서 기업가치 6천억원을 인정받은 모 스타트업 대표 P씨는 “정부의 특정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가거나, 혹은 자문위원에게 지적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노력한다”고 밝혔다. 이어 “자문위원으로 갈 시간이 부족하거나 사업에 전문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도 있지만, 정부 규제와 관련된 사업 문제로 다른 자문위원들의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대출 비교 서비스를 운영하는 P씨에게 대출을 집행하는 P2P 회사들에 대한 비난을 담은 질문은 부적절하다고 두어차례 반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초청한 자문위원은 사업 내용이 다른 것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는 평이다.
국회의원들과 만나는 자리에 참석했던 스타트업 대표 C씨의 경험도 비슷하다. 정부 모태펀드의 금액, 배정 비율 등을 심사하는 자리에서 만난 국회의원은 마치 자기 돈을 내주는 것처럼 권력을 자랑한 것도 모자라 현장 사정을 전혀 모른 채 ‘AI기업에만 너무 많이 배정하면 안 된다’는 주장만 반복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정부 모태펀드 자금을 받은 국내 VC의 투자 심사역들이 자료를 올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나 위험이 많은 회사인지, 정부의 특정 부처에게 피해가 되지는 않는지와 같은 주제로 토론을 하거나 해당 기업에 대한 질문은 전무하고, 그저 창업진의 학벌이나 경력만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유니콘 키우려면 정부가 빠지거나, 유능해지거나
VC 전문심사역 S씨는 “유니콘을 정부가 정말로 키우고 싶으면 정부가 발을 빼고 모태펀드 자금만 투입하거나, 아니면 해외 VC들 수준으로 유능해져야 한다”며 “현실적으로 둘 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정부 모태펀드를 받은 VC들에게서는 가능하면 투자받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밝혔다.
CVC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부가 못하는 자리를 메워 넣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정부의 모태펀드를 받고 투자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만큼,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이어 “심지어 정부 모태펀드 없이 민간 자금으로 투자하는 경우에도 국내 LP들과 어떤 관계인가에 따라 투자 신속성과 과감성이 달라질 텐데, CVC는 일반 VC들보다 더 규모가 있는 만큼 시장 역할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대표 P씨도 “CVC가 규제 없이 시장에 들어오는 것은 환영한다”면서도 “그간 한국 시장에서 부족했던 과감한 결단, 도전적인 투자 의식이 있어야 CVC가 유니콘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지금까지와 같은 분위기로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놨다. P씨의 스타트업은 최근 6천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면서는 해외 VC들에게서 투자를 유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