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스타트업이 원하는 인재의 모습이 바뀐다
챗GPT 등 생성AI 시장 성장에 기획, 개발, 디자인 멀티 플레이어 수요 증가 자기주도적인 ‘프라블럼 솔버’형 인재에 대한 수요도 급증 벤처 관계자들, 멀티 플레이어와 프라블럼 솔버는 다르다는 점 강조
챗GPT가 출시되면서 ‘프롬프트 엔지니어(Prompt Engineer)’에게 연봉 1억원 이상을 제시하는 스타트업 ‘뤼튼’의 채용 공고가 화제가 됐다. 그간 IT 업계에서 엔지니어는 프로그램 코드를 열심히 작성하는 개발자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이었지만 생성형 AI 열풍이 일자, 제대로 된 프롬프트 설계를 통해 원하는 답을 바로바로 뽑아낼 수 있는 인재가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기본 개발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플랫폼이 탄생한 만큼, 인력에 대한 기업들의 요구 사항이 높아졌음은 물론, 업무 또한 더욱 다양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모바일 초저가 커머스 플랫폼 ‘올웨이즈’ 운영사 레브잇은 기획, 개발, 디자인 등의 주요 업무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프라블럼 솔버(Problem Solver)’를 찾는다는 공고를 냈다. 기본 연봉은 6천만원, 스톡옵션은 1억원에 달한다. 전 직장 대비 연봉 20% 이상 옵션도 제시했다.
스타트업이 원하는 인재상의 새로운 모습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과거 스타트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속도전’을 따라올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다. 소수의 인력으로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조직의 특성상 멀티 플레이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부터 챗GPT를 비롯한 각종 AI 도구들이 개발되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상도 변화하고 있다. 더욱 고차원적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고도의 멀티 플레이어에 대한 요구가 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실리콘밸리에서는 미 동부의 여느 기업들과 다른 방식의 채용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통상 미 동부의 대기업들은 IT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있어 기획, 디자인, 개발이 따로 구분돼 있으며, 기획 업무가 끝나면 순차적으로 디자인, 그다음 개발이 진행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인력의 수준이 높은 데다 속도전에 중점을 둔 실리콘밸리는 기획 회의에 디자인과 개발이 모두 참여해 공통의 의견을 도출하고, 기획이 진행되는 도중에 디자인과 개발이 함께 이뤄지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미 동부 출신의 인력들이 고액 연봉과 ‘워라밸’에 이끌려 서부로 이직했다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두 업무 방식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근 국내의 스타트업들도 미 동부나 국내 대기업 방식에서 탈피해 멀티 플레이어에 대한 선호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강남 일대에서 IT 스타트업을 5년째 운영 중이라는 한 스타트업 대표는 “창업 초기에는 ‘개자이너’, ‘디발자’ 등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개발과 디자인을 모두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력들의 역량이 매우 낮은 적이 많았다”며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기획부터 출시까지 전부 다 하고 싶으니까 단독으로 업무를 맡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이 늘었다고 전했다.
미니 CEO를 원하는 스타트업 인재들
레브잇도 ‘프라블럼 솔버’로 채용하는 인력들을 ‘미니 CEO’라는 형태로 업무 전권을 부여한다. 덕분에 근무 환경도 자율적이다. 자율출퇴근제와 자율휴가제를 도입하고, 프라블럼 솔버 전원에게 법인카드도 지급한다. 법인카드로 식대, 간식, 운동비, 야간 택시비, 교육비, 도서비 등 개인의 성장과 업무를 위한 모든 비용을 무제한 결제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이른바 ‘꼰대’ 문화를 피하려고 하는 MZ세대의 수요에 적절한 채용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내 대기업식의 상명하복 구조에서는 발휘할 수 없었던 역량과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업무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반면 자율업무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미니 CEO로서 전권을 부여받은 만큼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는 형태로 책임도 분배돼야 하는데, 가장 강력한 책임소재인 급여가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스톡옵션 1억원으로는 충분한 유인이 될 수 없으며 연봉만 인상한 후 이직에 활용하는 악성 구직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쿠팡, 토스 등이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개발자를 채용할 당시 업계에서는 “1억, 1억 5천으로 연봉 올린 다음 이직 시 연봉 협상에 활용하려는 것”이라는 비난이 돌기도 했다.
‘프라블럼 솔버’보다 뚫을 수 없는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사 찾아야
벤처 업계 관계자들은 챗GPT로 개발 및 디자인 업무의 난이도가 내려간 덕분에 프라블럼 솔버가 시장에 다수 등장할 수 있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스타트업 대부분의 업무가 주어진 매뉴얼 없이 단독으로, 또는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적극성과 문제 해결력을 갖춘 인재를 찾는다는 관점으로 채용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프라블럼 솔버가 자칫 멀티 플레이어의 이미지로 요약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삼성동에서 밸류에이션 약 6천억원대 스타트업 경영진으로 있는 K모 이사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인재를 찾기는 쉽지 않다면서, 최근 들어 일부 스타트업들이 멀티 플레이어 채용과 프라블럼 솔버 채용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