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VC 관례로 자리잡은 ‘투자자 사전동의권’ 유효 판결

2심 뒤엎고 1심 인정한 대법원, 투자자 사전동의권 무효 판결 파기 VC 업계 “사전동의권은 불확실한 투자에 보호하기 위한 최소 수단” 사전동의권 무기로 스타트업 신규투자 방해하는 경우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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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서 ‘기업이 신규 투자를 유치할 때 기존 투자자의 사전동의권은 무효가 된다’는 2심의 판결을 기각했다. 이로써 지난 2016년부터 이어져 온 긴 소송전이 사실상 벤처캐피털(VC)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VC 업계에서는 한숨을 돌렸다는 후문이다.

대법원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주주 차등 취급 정당해”

15일 벤처투자 업계에 따르면 지난 14일 대법원이 액정표시장치(LCD) 제조업체 A사가 가상데스크톱 솔루션 업체 B사를 상대로 제기한 상환금 청구의 소를 파기환송 했다. 지난 2016년 A사는 B사의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인수하며 B사가 유상증자 등을 진행할 경우 사전동의를 받기로 계약했다. 해당 계약은 A사의 사전동의 없이 유상증자를 진행할 경우 B사가 조기상환청구권과 위약벌 등을 부담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하지만 B사는 A사의 사전동의를 받지 않고 타 기업으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았고, 이에 A사는 계약서상 사전동의권 위반을 근거로 기존에 인수한 RCPS 원금과 위약벌 총 46억8,466만원을 상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는 A사가 일부 승소했지만 이어진 2심에서 고등법원이 1심 판결을 기각하고 B사의 손을 들어줬다. B사의 일부 주주인 A사에게만 사전동의권 등 우월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주주 평등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대법원은 1심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부 주주에게만 우월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건 무효가 될 수 있지만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 근거를 밝혔다.

이로써 약 7년에 걸친 소송전은 A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다만 일부 법률 관계자들은 “대법원판결 중 주주 평등 원칙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에 A사가 적용되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며 “승리를 속단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기존 투자자 보호하는 ‘사전동의권’

대법원의 판결에 VC들은 한숨 돌린 분위기다. 만일 2심 판결이 그대로 인용됐을 경우 그간의 투자 관행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기존 투자 계약서의 사전동의권 관련 내용이 전부 무효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VC 시장에서는 스타트업 유상증자 시 기존 주주들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투자 원금과 위약벌을 상환해야 하는 약정을 관례적으로 포함한다. 사업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스타트업에 제동을 가할 마땅한 안전장치가 없는 VC들의 추가 손실을 막기 위해서다.

예컨대 한 스타트업이 총 3번의 투자(시드 투자, 시리즈 A, 시리즈 B)를 유치한 상황에서 추가로 시리즈 C 투자를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스타트업이 자금난을 이유로 무리하게 기업가치를 낮춰 투자 유치를 시도한다면 기존 투자자들은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만일 기존 투자 계약에 ‘신규 투자 시 기존 투자자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면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를 무마해 손해를 피할 수 있다. 반면 고등법원의 판결대로 사전동의 조건이 무효화 될 경우 투자자가 입을 손실에 대한 보호는 일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은 “투자 과정에서 기존 투자자에 사전동의권을 부여하는 것은 회사의 경영 활동에 대한 감시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 역시 “모태펀드를 운영하는 한국벤처투자의 사후관리 가이드라인에도 사전동의 금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며 “사업 성패를 가늠하기 쉽지 않은 스타트업에 위험을 안고 투자하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성장의 저해 요소라는 평가도

한편 ‘기존투자자의 사전동의권’이 투자자 보호를 위한 역할보다는 스타트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독소 조항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통상적으로 VC는 투자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신주인수계약과 주주간계약을 체결한다. 그중에서 ‘주주간계약’은 VC의 투자사에 대한 합법적인 회사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데, 이때 주요 권한으로 사전동의권 규정안 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주주간계약은 투자사별로 다르게 진행하기 때문에 투자 계약에 생소한 신생 스타트업의 경우 이해관계 상충 및 모순을 통한 법률적 위험을 유발할 수 있다. 투자 유치에 급급한 나머지 충분한 검토 없이 투자 계약을 체결해 추가 투자 유치에 발목을 잡혀 기업 성장이 저해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는 이유다.

실제로 10억 달러(약 1조2,666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스냅챗(Snapchat)은 2012년 창업 초창기에 라이트스피드(Lightspeed)로부터 48만5,000달러(약 6억원)의 시드투자를 받았다. 투자 당시 라이트스피드의 VC 파트너 제레미 리우(Jeremy Liew)는 향후 스냅챗이 신규 투자를 진행할 경우 반드시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때문에 스냅챗은 신규 투자를 받을 때마다 라이트스피드로부터 제재를 당했고, 투자 유치를 위해 라이트스피드의 요구에 맞춰 계약수정을 반복하다 성장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일각에서는 주주간계약을 통합계약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각 투자사별로 다르게 규정하는 ‘사전동의권’ 규정안을 하나로 통합해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스타트업의 추가 투자 유치를 촉진시키자는 것이다. 하지만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해당 주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실무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신규 투자자들이 자사 사정에 맞춘 새로운 조건을 제시할 경우 기존 투자자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농후해져 결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저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