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창업자’에 더 혹독한 벤처투자 시장, 초기 단계일수록 자금 조달 더 어려워
올 상반기 미국 여성창업 스타트업 투자 유치액, 전년 대비 54.8% 급감 국내는 더 심각, 지난해 시리즈 A 투자유치 기업 중 여성기업 6.9%에 그쳐 VC 업계 “시장 위축될수록 기업 실적 같은 ‘숫자’보단 ‘사람’ 보는 경향 있어”
글로벌 경기 위축에 벤처투자 시장의 혹한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여성 창업자가 혼성으로 구성된 참업팀에 비해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각에선 벤처캐피털들이 시장이 위축됨에 따라 기업들의 실적과 같은 ‘숫자’보단 창업주인 ‘사람’을 보고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혼성 창업팀, 여성 창업팀보다 4배 이상 투자 건수 많아
벤처 투자 정보기업 피치북 조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에서 창업주가 혼성으로 구성된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은 241억 달러(약 30조원)를 기록한 반면, 여성으로만 구성된 스타트업은 14억 달러(약 18조원)에 그쳤다. 투자 건수 또한 혼성 창업팀이 1,531건으로 여성 창업팀(437건)보다 4배 이상 많았다.
올해 여성 창업팀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 유치한 자금 14억 달러는 전년 동기(31억 달러) 대비 54.8나 줄어들었는데, 이는 지난 2017년 상반기(12억 달러, 1조5,383억원)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이 밖에도 2021년 상반기에는 40억 달러(약 5조원), 2020년 상반기에는 18억 달러(약 2조3천억원)를 모금하는 데 그쳤다.
전체 스타트업 투자 유치에서 여성창업이 차지하는 비율도 지난 10년간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피치북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해당 비율은 1.6%로 지난해(2%)보다 줄었다. 2014년 이후 여성창업 비중이 가장 높았던 해는 2017년으로 2.6%에 불과한 반면, 혼성창업 비중은 지난해 17.6%에서 올 상반기 28.1%로 크게 늘어났다.
지난해 시리즈 B 투자 받은 스타트업 97곳 중 여성 기업은 ‘단 3곳’
국내 여성 벤처기업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있다. 여성경제연구소의 ‘여성 기업사례연구’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전체 스타트업에 투자된 금액(약 12조원) 가운데 여성 스타트업에 조달된 자금은 9,147억원(7.6%)에 불과한 반면, 나머지 약 11조원 가량은 남성 창업팀이나 혼성 창업팀에 조달됐다.
지난해에도 양상은 비슷했다. 지난 1년간 시리즈 A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216개 가운데 여성 기업은 15개로 전체 6.9%에 불과했다. 시리즈 B 투자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해 1년간 시리즈 B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총 97개 가운데 여성 기업은 단 3개(3.1%)뿐이었다.
여성 창업자들은 국내 벤처투자 업계에 자리한 남성 중심의 문화 때문에 한국 여성 기업가들이 남성기업가들에 비해 여러 도전과 장벽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여성 벤처기업 CEO는 “시리즈 B 이하의 투자단계에선 기업의 실적보단 창업팀 대표의 관계나 성별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면서 “투자자와의 미팅에서 결혼이나 출산 같은 생애 주기 관련 질문을 자주 받아왔다. 주변의 어느 여성 창업자는 사업 아이디어를 발표 당시 임신 사실을 감추려고 일부러 헐렁한 옷을 입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에 국내 VC 심사관은 “아무래도 국내에선 여성 대표 기업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여성 창업주 심사의 경우 다양한 질문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면서도 “특히 지금 같이 투자 리스크가 높아진 시장 상황에선 기업 실적 외에도 창업주가 가진 잠재적 리스크를 더욱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
학계 “여성 창업자 지원 확대 위해 정부 및 기업 전반이 나서야”
전문가들 사이에선 여성 창업주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도록 정부가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이숙 한양대학고 ERICA 경영학부 교수는 지난해 한국여성벤처협회가 개최한 국회 토론회 ‘여성벤처‧창업기업 현황과 정책 방향’에서 “여성 기업의 양적성장이 이뤄지고 있지만 기술 기반의 혁신형 벤처 확인 기업은 극소수”라며 “지원 정책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창업지원의 비중이 높아 정작 여성벤처나 스케일업 지원 사업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예산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정책 대상을 명확히 하고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미순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 세계 혁신형 여성 창업이 활발히 일어나는 비즈니스 모델을 모니터링해 정보를 제공하고 여성 창업 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양한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전을 활성화해 기업가정신을 촉진하는 방법도 있다”고 강조했다.
학계와 여성 기업인들의 지속적인 요청에 여성 창업자들에 대한 지원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먼저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 2월 여성 특화 창업기획자 프로그램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해당 사업은 교육과 상담(컨설팅) 위주의 기존 여성 지원 사업들과 달리 창업기획자가 직접 선발한 여성 기업에 민간투자를 병행한 네트워크 지원으로 제2의 ‘컬리’와 같은 유망 여성벤처의 탄생을 유도하기 위해 도입됐다.
업계 차원에서도 여성 스타트업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소속 VC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최근 주한미국대사관이 주최한 여성 창업자 경진대회 ‘더파워 프로그램’을 후원하며 여성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을 도왔다. 또한 구글과 같은 빅테크 기업도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Google for Startups, GFS)’의 파운더스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여성 창업자들에 대한 리더십 코칭을 확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