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日 반도체 르네상스 ① 3가지 희망
주특기 전자 부문 무역적자 급증에 반도체 부활 시급한 日 한국·대만의 지정학적 약점과 글로벌 공급망 틈새에 수혜 미국의 中압박·공급망 신설 시도에 중추적 역할
지난해 일본은 전자 및 통신 기기 분야에서 2조 엔(약 18조1,280억원)이 넘는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데이터 센터 등 IT 장비 시장에서 반도체의 영향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도체 영향력이 높아졌는데 왜 일본이 적자를 보게 될까. 전자·통신 기기는 제조 강국 일본의 주력 산업 가운데 하나지만 정작 일본의 산업 포트폴리오에는 최첨단 반도체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 △생성형 AI △자율주행 △6G △스마트 시티 △메타버스 등 21세기의 주역으로 꼽히는 산업들 모두 최첨단 반도체가 필수다. 전문가들은 최첨단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지 못할 시 일본의 무역적자는 2030년까지 10조 엔(약 90조6,4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전자 및 통신 기기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증가해도 일본의 무역적자가 증가하는 역설적인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잃어버린 30년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품으로 찬사를 받았던 일본이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을까. 1980년만 해도 세계 시장점유율은 미국이 60%, 일본이 30%였으나, 1987년에는 일본 80%, 미국 10%로 상황이 역전됐다. 당시 상위 10개 반도체 기업 중 6개(NEC·도시바·히타치·후지쯔·미쓰비시·마쓰시타)가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2021년 기준 일본의 점유율은 6%로 급감했다. 기술 수준도 뒤쳐져서 40nm(나노미터) 반도체만 생산 가능하다.
그사이 한국, 대만 등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지만 미국의 대일 제재가 제1원인으로 꼽힌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급속한 경제 및 기술 성장에 대한 위협으로 미국은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를 강행했다. 흔히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경제 침체기의 시발점이다. 이로 인해 달러당 240엔이던 엔·달러 환율은 1987년 120엔까지 수직 하락했다.
엔화 절상으로 일본산 반도체 수출 경쟁력까지 크게 하락하면서 자연히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제품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에 따라 일본 반도체에 100% 관세가 부과됐고 1996년까지 제재가 이어졌다. 미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1996년까지 2차와 3차 협정을 추가로 체결하기도 했다. 이때 반사이익을 얻은 기업이 삼성전자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한 1983년 ‘도쿄 선언’ 당시 메모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에서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까지 내놓으며 경시했다. 하지만 삼성의 뒤에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형님’이 있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 성장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삼성으로의 반도체 기술 이전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렇게 삼성전자는 일본 기업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반도체 지원 2.0’으로 대응했다. 200억 엔(약 1,813억원) 규모의 차세대 기술 공동 개발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정부의 지원이 간섭으로 작용해 기업 경영 효율화에 방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일본 정부가 출범시킨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파산했고, 도시바는 누적 적자를 못 이겨 2017년 반도체 사업 부문을 SK가 포함된 해외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당시 SK하이닉스는 지분 15%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래 싸움에 즐거운 일본
인고의 세월을 지나 오늘날 일본은 다시금 반도체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주요 배경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오늘날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맞붙은 상황은 일본에 있어 놓쳐서는 안 될 기회다. 잃어버린 30년을 되찾으려는 일본의 야심을 미국이 지원해 주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일본 반도체 산업을 몰락시켰던 미국이 아이러니하게도 반도체를 비롯해 첨단 기술 분야에서 일본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 능력,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일본의 반도체 소재, 대만의 파운드리 경쟁력을 통합해 글로벌 공급망을 최적화하려는 미국의 구상인 ‘칩 4 얼라이언스’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과거 미국에 한번 데였던 기억 때문인지 일본은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앞서 별도의 정상회담을 갖고 반도체와 AI, 양자컴퓨터 등 최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와 합의에 따라 올해 첨단 반도체 연구 거점인 ‘최첨단반도체기술센터(LSTC)’를 설립한다. LSTC는 미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와 함께 첨단 반도체 개발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LSTC에 3,500억 엔(약 3조3,333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는 모두 본질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이다. 현재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미만의 최첨단 반도체는 모두 대만과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대만은 끊임없이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는 데다,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해 있으며, 반도체 기업들의 핵심 생산 시설 상당수가 중국에 있다. 반도체 산업의 주요 축인 한국과 대만이 지정학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경우를 대비해 일본을 키우겠다는 미국의 복안이다.
소부장과 인프라의 힘
또한 일본은 글로벌 반도체 환경에서 첨단의 기술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산업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는 여전히 확고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는 말처럼 이를 기반으로 언제든지 다시 날아오를 잠재력이 있다.
2019년 7월 일본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3대 품목(극자외선 포토레지스트: EUV PR, 불화수소:HF, 불화폴리이미드:FPI)과 관련,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했을 정도로 이 분야의 ‘갑’으로 통용된다. 미국 조지타운대 안보·신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일본의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은 35%로 미국(40%)에 이은 세계 2위고, 반도체 소재는 55%로 1위다. 반도체 기업 관련 인프라가 이미 충분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일본은 최고의 ‘테스트베드’이자 ‘훌륭한 시장’이다. 일본에는 소니, 닌텐도, 도시바, 교세라 같은 정보기술(IT) 기기 업체와 NTT, 소프트뱅크 등 통신업체는 물론, 최근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자동차 대기업들까지 반도체를 활용하는 반도체를 활용하는 대기업들이 다수 포진돼 있다. 삼성전자나 마이크론 같은 유수의 반도체회사들의 일본 진출 역시 단순 보조금보다는 이런 세계적인 규모의 일본 기업들을 겨냥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 미국, 대만 업체들의 시장 지배력과 무관하게 기술 발전과 원가 절감을 위해 일본 소부장은 필수 불가결하다. 대체 불가능한 최고급 소부장 기술을 고려할 때 일본 소부장 없이는 반도체 제조가 어려울 정도다.
기록적인 슈퍼 엔저
마지막으로 일본 반도체 부활을 돕는 요인은 작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기록적인 엔화 약세로, 이른바 ‘슈퍼 엔저’ 현상이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한때 150엔을 돌파한 후 현재는 140엔 전후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요국들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 긴축 정책에 발맞춰 기준금리를 올린다. 그러나 유독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여전히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GDP 대비 230%가 넘는 국가부채를 고려할 때 금리 상승에 따른 이자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전환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에도 일본의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 우려로 인해 일본은행은 통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완화하고 있다. 이는 자연히 엔화 약세로 이어졌으며,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달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 끈기 있게 금융 완화를 지속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한동안 엔저 현상이 지속될 전망이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 있어 엔저 현상은 수출 경쟁력이 강화된다는 이점이 있다.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공격했던 30여 년 전과는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다. 일본은 3가지 전략적 이점을 바탕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입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