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오일’ 시대 준비하는 사우디, 미국·일본 등 세계 각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확대
미국 벤처 시장 침체에도 전년 동기 대비 40% 이상 투자 늘려 ‘일본·중국·한국’ 등에도 벤처·스타트업 투자 비중 확대 탈석유 산업 다각화 전략인 ‘비전 2030’ 위한 대규모 경제협력
사우디아라비아가 엑시엄스페이스, 나일 등 미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이 밖에도 일본과 중국 기업에도 투자하고 있으며 국내 게임 및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선제적 투자를 통해 창업 생태계를 조성한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벤치마킹해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비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벤처시장 혹한기에도 적극적인 사우디 기관투자사
미국의 민간 상업용 우주정거장 스타트업 엑시엄스페이스(Axiom Space)는 시리즈 C 투자 라운드에서 3억5,000만 달러(약4,625억원) 규모를 조달했다고 21일(현지 시간) 밝혔다. 이번 라운드는 국내 제약사 보령과 사우디아라비아 벤처캐피탈(VC) 알자지라캐피탈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누적 투자 유치액은 5억500만 달러(약 6,670억원)로 일론 머스크의 우주탐사 기업 스페이스X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을 기록했다.
사우디 국부펀드(PIF) 산하에 있는 사나빌 인베스트먼트도 이달 초 미국의 엔터프라이즈 NaaS(Network-as-a-Service) 스타트업인 나일(Nile)에 1억7,500만 달러(약 2,314억원) 규모의 시리즈 C 투자를 진행했다. 이처럼 최근 들어 미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사우디 기반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글로벌 스타트업 데이터베이스 플랫폼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PIF를 포함한 사우디 투자자들은 △2019년 9건 △2020년 16건 △2021년 23건 △2022년 32건 △2023년 현재 13건의 미국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크런치베이스 관계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 스타트업에 대한 사우디 기반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면서 “고금리 여파로 지난해 벤처시장이 크게 침체에 빠졌음에도 투자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40% 이상 늘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MOU 체결 이후 국내서도 ‘사우디 투자자들’ 관심 부쩍 늘어
사우디는 미국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에도 활발히 투자하고 있다. 먼저 올해 초 사우디 아람코의 벤처 투자회사 와에드 벤처스(Wa’ed Ventures)는 일본의 드론 스타트업 테라드론(Terra Drone)에 1,400만 달러(약 185억원)을 투자했다. 2013년에 설립된 와에드 벤처스는 미래 성장 가치가 높은 초기 스타트업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올해 2분기까지는 중국 기업들의 지분을 대거 사들이기도 했다. PIF는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의 주식을 41%(145만 주)나 더 늘렸다. 이는 2분기 PIF 주식 포트폴리오에서 일어난 최대 조정으로 ‘차이나 리스크’에 미국 투자자들이 팔아치운 물량을 대량 매수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우리나라에도 적극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나라와 40조원 규모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이후 올해 6월 중소벤처기업부와 1억6,000만 달러(약 2,117억원) 규모의 공동 펀드 조성을 체결하기도 했다. 공동 펀드는 사우디가 주요 출자자로 참여해 조성 중인 펀드에 한국벤처투자가 1,000만 달러(130억 원)를 출자하는 방식으로 국내 기업에 최소 1,000만 달러 이상을 의무적으로 투자될 계획이다.
이외에도 PIF는 올해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6,000억원을 투자하는가 하면 국내 게임업계 1위 넥슨 지분을 10% 넘게 사들이기도 했다. 국내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사우디 기관투자가들의 관심이 지난해 MOU 이후 부쩍 늘었다”면서 “국내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유치뿐만 아니라 사우디 진출을 지원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네옴시티’ 건설 등 포스트 오일 시대 대비하는 사우디
사우디가 세계 각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이유는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선제적인 투자를 통해 창업 생태계 및 인프라를 구축한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국 기업을 길러내겠다는 의도다.
사우디 국영기업 사나빌의 라이언 애비(Rayan Aebi) 투자담당자는 지난 5월 국내에서 열린 스타트업 투자설명회에서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포스트 오일에 대비하기 위해 분주하고 네옴시티 역시 그중 하나”라면서 “현재는 창업 에코시스템을 조성하고 기업을 키우기 위해 준비 중이며 가장 모범적인 한국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방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우디가 세계 국가들과 교류를 늘리는 보다 궁극적인 배경에는 탈석유 산업 다각화 전략인 ‘비전 2030’이 있다. 현재 사우디는 ‘비전 2030’이라는 이름으로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한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해당 비전에는 면적만 서울의 40배 규모인 스마트 및 친환경 도시 ‘네옴’(Neom)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국가 전체를 엔터테인먼트와 게임, 메타버스·가상현실(VR) 등을 기반으로 디지털 강국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파이살 빈 파르한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석유 기반이었던 경제 구조를 다각도로 확장을 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한국과 공동 투자, 생산, 기술 개발 등 광범위한 협력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면서 “비전 2030의 한 축이 원유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다양화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 축은 기후 변화와 에너지 전환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