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난 국가 R&D에 지원 돕는 ‘브로커’ 급증, 수수료 최대 40%까지 요구
‘컨설팅 및 서류 작성’ 등 R&D 사업 지원 대리 명목으로 수수료 요구 ‘공무원 사칭’ 등 사기 행위 명확하지 않으면 처벌 어려운 탓에 더욱 활개 학계서도 ‘연구계획서 대행’ 브로커 존재, 정부 예산 전면 재검토 나서야
기업의 정부 연구개발(R&D) 사업 지원 준비를 돕는 명목으로 수수료를 요구하는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국가 R&D 예산 규모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정부 R&D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계 등 학계에서도 연구비 나눠 먹기 등 후진적 관행에 따른 국가 예산 낭비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브로커, 전국에 약 1만 곳 넘게 포진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민의힘 실무당정협의회에서 정부 R&D와 관련된 다양한 브로커 사례가 소개됐다. 정부 R&D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좀비기업’을 돕는 브로커들이 전국에 약 1만 곳이 넘으며, 이들은 수수료 명목으로 지원금의 10% 많게는 40%까지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발표된 사례 가운데 동일 기업이 유사 주제의 R&D 과제를 반복적으로 수주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과기부에 따르면 2015부터 2019년까지 정부 R&D 과제를 15회 이상 중복으로 지원받은 기업은 106개사에 달했다.
R&D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근래 정부의 R&D 지원금이 대폭 증가했기 때문이다. 과기부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9년까지 국가 R&D 예산 규모는 10조원에서 20조원으로 점차 늘어난 반면, 최근 4년 동안 예산 규모는 30조원까지 단숨에 증가했다.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R&D 예산이 중소기업 연명 수단으로 전락했다”면서 “지난 정부에서 R&D 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과정에서 그릇된 관행이 발생한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과기부는 이날 당정협의를 통해 연구팀 간 경쟁형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대안을 마련할 방침이다.
버젓이 ‘웹사이트’ 만들어 홍보하는 곳도
일반적으로 R&D 브로커들은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들에 제안서가 담긴 메일을 보내 자신들을 홍보한다. 이들은 컨설팅 협약을 맺으면 이자는 물론 담보나 보증, 상환 의무도 없는 정부 지원금을 받게 해주겠다는 식의 솔깃한 제안을 건넨다.
이외에도 창업 설명회, 지식산업센터 투자 권유 행사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부 지원금이 필요한 기업 관계자들을 유혹한다. 최근에는 사업자 지원사업 매칭 플랫폼 등 온라인에서도 ‘정부 지원 사업 컨설팅 전문회사’라는 이름으로 홍보 게시글을 등록해 대상자를 모집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브로커들이 버젓이 영업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처벌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2019년 14개 브로커 업체에 대해 현행법 위반 소지를 적용해 사법기관에 수사 의뢰했지만, 이들 모두 증거 부족 등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운영하는 ‘정책자금 브로커 신고 센터’가 존재하지만, 실제 이 센터를 통해 접수된 신고 기업 중 처벌받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성공보수나 협약금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컨설팅에 대한 대가”라며 “브로커들이 개인 또는 기업 간 계약이라고 주장할 경우 불법 행위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처벌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도 ‘연구비 따먹기’는 오랜 관행
R&D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는 것만큼 과학기술계의 연구비 나눠 먹기 등 후진적 관행도 국가 예산이 낭비되는 주요 사례다. 대한변리사회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인공지능(AI)·신약·헬스케어 분야에서 상위 10개 대학이 하반기 등록한 특허 가운데 약 70%는 상용화가 불가능하거나 사업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0개 중 7개는 특허를 위한 ‘깡통 특허’를 냈다는 뜻이다.
또한 지난 2004부터 2018년까지 국내 양자 분야 연구비 2,300억원에 할당된 과제 수는 무려 235개에 달했다. 이는 양자와 같은 첨단 연구 과제 1건당 연구비가 10억원에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학계의 연구비 나눠 먹기, 과제 쪼개기 등이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지난해 정부가 대학에 지원한 R&D 예산의 절반 가까이는 50대 교수가 차지했다. 30대 이하 젊은 연구자들이 지원받은 예산은 전체 5%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거 국내 K대학에서 근무했던 대학 관계자는 “정부 보조금을 얻기 위해 연구계획서 등의 준비를 대행하는 브로커들이 일부 연구실을 드나들고 있다”면서 “보조금 지원서는 논문처럼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기도 하고, 지원 분야도 다양해서 대행을 통해 지원해도 알기 어렵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R&D 투자비 비율은 4.9%로 세계 2위 수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진적 관행이 뿌리 깊은 탓에 연구·개발비 100만 달러당 특허 건수는 고작 0.03건으로 실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연구·개발 성과가 상당히 저조하다. 정부가 조속히 R&D예산 전면 재검토와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