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협회 “복수의결권은 비상장 벤처기업 지원 위한 규제개혁 입법”
경실련, 복수의결권 남용으로 대기업 경영 승계에 악용될 수 있다 주장 벤처기업협회, 한시 제도며 대기업은 적용 대상 아니라 반박 업계 관계자들은 쫓겨나던 창업자 보호 가능성에 우려보다 기대감 더 커
스타트업의 복수의결권에 대한 2가지 쟁점이 맞부딪치고 있다. 지난 18일 벤처기업협회는 비상장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을 허용하는 벤처기업법 개정안이 반개혁 법안이 아닌, 벤처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시금석이 되는 법안이라고 밝혔다. 앞서 14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경제 분야 반개혁 입법 사례 중 하나로 벤처기업법 개정안을 지적한 바 있다.
벤처기업협회는 “현재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기업 경영환경을 조성하고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 되는 복수의결권 제도가 왜 반개혁 입법이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과거의 법과 규제로 기업 경영을 옭아매고 가정적 상황을 우려하여 혁신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과연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필요한 행동인지 염려된다”고 주장했다.
복수의결권 제도, 재벌 대기업 세습에 악용된다?
지난 14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벤처기업에 한시적으로 허용되는 복수의결권 제도가 재벌 대기업의 세습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벤처기업협회는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은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로 제한됐다”면서 “상속·양도·이사 사임·대기업집단 편입 및 상장(3년 유예) 시 보통주 즉시 전환 등 투명한 관리로 오남용을 차단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재벌 2·3세가 세운 기업은 대기업 집단에 포함돼 벤처기업이 될 수 없어 벤처기업에 한정한 복수의결권주식 제도 활용 역시 불가능하다”며 “복수의결권 주식 제도를 상장회사나 대기업에 적용하는 문제는 장기간의 치열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를 전제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벤처기업협회는 복수의결권 제도가 해외 사례에서도 특정 대기업 2·3세 출신 창업자의 의사 결정 역량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부분을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 복수의결권 제도를 도입한 대부분의 국가는 1주 1의결권을 원칙으로 하면서 복수의결권 주식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어 벤처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글로벌 수준의 법령을 갖춰줘야 한다는 주장도 뒤따랐다. 상법에는 이미 주주총회에서 감사 또는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대주주가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이 3%까지만 인정되는 일명 ‘3%룰’, 무의결권 주식 등 1주 1의결권 원칙 예외가 다수 설정돼 있다. 그런 만큼 정책목표에 따라 의결권을 달리 정하는 것은 1주 1의결권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말 많았던 복수의결권 제도, 창업자 보호 필요하나?
벤처 업계에서는 올해 1월 경영권 내부 분쟁으로 인해 결국 회사를 떠난 메쉬코리아의 유정범 대표도 복수의결권 제도가 있었다면 좀 더 회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지난해 2월부터 기업 경영이 악화되자, 유 대표는 360억원의 초단기 자금을 빌리고 결국 회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복수의결권이 확보돼 있었을 경우 유 대표처럼 헐값에 회사를 넘기며 쫓겨나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뜻이다.
스타트업 대표가 투자 라운드를 돌며 약속했던 ‘마일스톤(Milestone, 매출액, 가입자 숫자 등의 목표 수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투자자들이 스타트업 대표를 바꿔버리는 사례들이 최근 들어 속속 등장하면서, 스타트업계에는 “고생해서 키워놔도 투자자들 돈놀이에 회사 뺏긴다”는 속설마저 돌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금융 시장이 경직되면서 투자금 유치가 어려워진 데다, 기존 투자자들과 자칫 관계가 틀어질 경우 회사를 뺏기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반복될 경우에 벤처 창업 의지가 꺾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빈대 잡려고 초가삼간 태워서는 안 된다
반면 경제 개혁 단체들은 스웨덴 최대의 기업 발렌베리그룹의 황금주 제도를 언급하며 복수의결권 제도를 악용할 경우 대기업 세습을 합리화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삼성의 롤모델로도 잘 알려진 발렌베리 가문은 1856년 창업주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금융업으로 시작해 5대째 이른 지금, 스웨덴 국내 총생산(GDP) 1/3을 차지하는 최대 기업이다. 발렌베리 기업은 속칭 ‘황금주(Golden share)’라고 불리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경영 세습을 보장받는다. 소유주 일가가 보유한 주식의 주당 의결권은 10~1,000개로, 지분 19%로 41%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벤처 업계 관계자들은 반론을 제기했다. 발렌베리그룹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 기업들의 경우 차등의결권으로 기업 경영권을 보장받는 대신 거액의 세금 납부를 통해 사회 환원에 기여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기업의 경영 세습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다. 발렌베리그룹도 1938년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겠다는 샬트셰바덴협약을 스웨덴 정부와 함께 체결한 바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복수의결권을 활용할 경우 해당 대기업이 여론의 질타를 받아 기업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내놓는다.
한 벤처 업계 관계자는 “이미 제도적으로 대기업이 특혜를 받을 수 없는 구조가 완성돼 있다”면서 “설령 무리해서 황금주를 활용하더라도 상장 후 3년 유예를 받는 것이 한계이기 때문에 경제 개혁 단체들의 우려는 지나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벤처 업계 전반에서는 순기능에 대한 언급이 대세다. 페이스북(현 메타)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20%의 지분만 소유하고 있어도 60%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 소액주주들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창업 경영진이 회사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만큼, 투자자들이나 소액주주들 연합이 회사의 경영을 좌우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사례는 한국 상장을 포기하고 미국 상장을 선택했던 쿠팡의 김범석 의장에 대한 시장의 반응에서도 확인된다. 굳이 한국을 선택하지 않고 미국 상장을 통해 황금주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고, 회사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할 수 있어 효율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벤처기업협회는 “글로벌 경제에서 우리 벤처기업이 불리하지 않도록 각종 규제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개선해야 하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는 등 지속적인 입법 개혁·지원이 필요하다”면서 “소모적 논쟁은 그만하고 현장에서 제도가 잘 안착해 벤처기업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