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규제 벗어난 日 애니메이션, OTT 타고 ‘덕후’들의 품으로
일본 콘텐츠 규제 폐지 후 3개월, OTT에 불어든 '日 애니메이션' 열풍 수년간 '공개 예정'이었던 콘텐츠들 고삐 풀렸다, 애니메이션 팬덤은 '환호' 일각서는 "국내 애니메이션 설 자리 좁아질 것" 우려 제기, 시장 판도 어떻게 변할까
최근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에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이 대거 공급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일본 비디오물(영상물)도 OTT가 자체적으로 등급을 분류해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국내에서 줄곧 ‘공개 예정작’ 자리에 머물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줄줄이 공개된 것이다. 수많은 인기 애니메이션이 시장에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슬램덩크>와 같이 국내 콘텐츠 시장에 반향을 일으킬 만한 작품이 등장할 수 있을지 촉을 곤두세우고 있다.
‘명분도, 효과도 없다’ 일본 영상물 규제 폐지
그동안 국내에 유통할 수 있는 일본 영상물은 국내 방송사가 수입해 TV에서 방영한 작품,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가 심의를 통해 등급 분류를 한 영화뿐이었다. 2004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 시행 당시 제정된 규제의 영향이다. 이외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예능, 다큐 등은 아예 등급 분류 신청이 불가능했다. 이에 미디어 유통 사업자들은 드라마, 예능 등의 비디오물을 ‘영화’로 위장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등 우회 방법을 거쳐 콘텐츠를 유통해 왔다.
규제 개혁의 시발점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데이즈>였다. <더 데이즈>는 지난 6월 전 세계 76국에 동시 공개됐으나, 국내에서는 공개가 차일피일 지연됐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부가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여론이 악화할 것을 우려해 국내 방영을 막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일본 콘텐츠에 대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 정책이 엉뚱한 오해를 낳은 것이다.
관련 규제 시행 후 자그마치 20여 년이 지났다. OTT나 IPTV 등 최근 콘텐츠 시장을 휩쓸고 있는 플랫폼들은 과거의 일원화된 규제에 꽁꽁 묶여 있었던 셈이다. 시장에서는 일본 비디오물 수입을 무작정 막는 것은 ‘낡은 규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등급 분류 제한 조치 자체가 이렇다 할 법적 근거 없이 정부의 정책으로만 시행된 만큼, OTT 사업자가 기존 제한 정책을 따르지 않아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7월 일본 드라마·예능 프로그램 등을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등급 분류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제를 폐지하고, 일본 콘텐츠도 ‘비디오물’로 등급 분류를 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단 선정성이 과도한 비디오물 유통은 기존 제한관람가 등급 제도에 따라 제한된다.
‘공개 예정’ 인기 애니메이션 속속 OTT로
일본 작품 규제 해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리틀 위치 아카데미아>였다. <리틀 위치 아카데미아>는 마녀 학교에 입학한 소녀의 성장을 다룬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해외 넷플릭스에서는 방영 연도인 2017년에 이미 공개된 바 있다. 하지만 한국 넷플릭스에서는 줄곧 ‘공개 예정작’ 신세였다. 국내 스트리밍이 가능해진 것은 관련 규제가 해제된 지난 8월부터다. 작품의 팬들은 “숙원을 풀었다”며 환영의 뜻을 드러냈다.
이후 국내 OTT 플랫폼에 등록된 애니메이션 작품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넷플릭스는 한 달에 10개 안팎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공개해 왔다. 하지만 규제가 해제된 7월에는 약 20개의 작품을 쏟아냈으며, 이후로도 매달 20개에 달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탑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피아노의 숲>, <페이트/엑스트라 라스트 앙코르>, <리비전즈> 등 몇 년 전 방영한 인기 애니메이션 작품, <주술회전 2기> 등 현재 일본에서 방영 중인 최신 인기작 등이다.
넷플릭스 외 OTT들도 애니메이션 라인업 강화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례로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이 많지 않았던 디즈니+는 최근 <피닉스: 에덴 17>, <도쿄 리벤져스 3기> 등 화제작을 공개했으며, 내년 1월 신작 애니메이션 공개 일정도 잡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즐기는 팬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에서 “무늬로만 개봉하는 불필요한 ‘편법’이 드디어 필요 없게 됐다”, “일본 현지 방영 1년 뒤에야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불상사는 이제 없겠다” 등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다.
국내 애니메이션으론 못 이겨, ‘제2의 슬램덩크’ 올까
업계에서는 올해 상반기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슬램덩크>의 사례와 같이, 차후 국내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점차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1990년대 국내외에서 인기를 끈 일본 만화 <슬램덩크>(대원씨아이)의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월 4일 개봉 이후 476만4,457명에 달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다시 한번 대한민국에 ‘농구붐’을 일으킨 바 있다.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이 국내에서 점차 ‘대중성’을 확보해 가는 가운데, 시장에서는 규제 완화를 기점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의 입지가 한층 좁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오랜 시간 동안 주로 어린이용 3D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국내에서 2D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인력들은 국내 게임이나 웹툰 쪽으로 이동하거나, 비교적 처우가 좋은 해외로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직접 손으로 그리는 2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일본이,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디즈니·픽사 등을 보유한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국내에 일본 애니메이션 공급이 확대된 이상, 이 같은 격차는 한층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이에 관련 업계는 일본 콘텐츠 규제 완화가 국내 콘텐츠 시장에 불러올 반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