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 가치 기술 빼돌렸는데도 ‘보석’, 국부 유출 부추기는 산업스파이 엄벌해야
국수본 "올해 2∼10월 산업기술 유출 범죄 총 146건 검찰 송치" 수백억원 연봉 제시하며 우리나라 연구진에게 접근하는 중국 기업들 처벌 강도 높이는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여전히 솜방망이 수준
올해 경찰에 적발된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이 최근 10년 내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도체·이차전지 등 한국의 핵심 첨단 기술이 주요 표적이다. 이같은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약한 처벌에서 찾을 수 있다. 수조원대 가치의 국내 기술이 해외로 흘러갔을 가능성에도 불구, 사법당국의 ‘솜방망이 처벌’에 산업계에선 한숨이 흘러나온다.
경제안보 위해범죄, 전년 대비 75% 증가
14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2∼10월 9개월간 산업기술 유출 등 경제안보 위해범죄를 특별단속해 해외 기술 유출 21건을 포함한 총 146건을 송치했다고 밝혔다. 이번 단속 기간 해외 기술 유출 송치 건수는 전년(12건) 대비 75% 증가한 동시에 최근 10년 내 가장 많다. 전체 경제안보범죄 사건 중 해외 기술 유출 비율은 14.4%로 2021년 10.1%, 2022년 11.5%에 이어 증가세를 나타냈다.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을 죄종별로 구분하면 국가핵심기술 2건을 포함한 산업기술보호법 6건(28.6%), 부정경쟁방지법 15건(71.4%)이었다. 피해기술은 디스플레이 8건, 반도체·기계 3건, 조선·로봇 1건, 기타 5건으로 나타났다. 기술 유출 피해를 본 기업은 대기업이 8건, 중소기업이 13건이었으며 기술 탈취를 시도한 피의자는 피해업체 내부인(15건)인 경우가 외부인(6건) 사례보다 많았다.
대표적 사례로 외국 정부 보조금 지원 연구사업 신청 목적으로 의료시술 로봇 관련 영업비밀을 유출한 외국 국적의 전 로봇개발팀 연구원이 검거됐다. 국내외 업체에 국내 대기업의 공장자동화 솔루션을 유출하고 LCD 공정 레시피 등 국가핵심기술을 은닉해 외국에 유출하려던 협력업체 대표 등 5명도 붙잡혔으며, 피해업체 대표가 해외에 장기 체류하는 사이 산업기술을 외부저장장치에 저장·유출 후 외국 경쟁업체로 이직해 사용한 전 연구원 등 4명도 검찰에 넘겨졌다.
초범이라고 봐주고, 피해액 산정 어렵다고 감경하는 사법부
이번 경제안보 위해범죄 단속 결과 중국으로 유출된 사례가 14건으로 가장 많았고 일본·미국·베트남·캄보디아·이라크·호주가 각 1건으로 파악됐다.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품목인 반도체 등 첨단 기술 탈취 시도는 미중 간 기술 경쟁의 격화 속에 더욱 증가할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중국은 자국 내 첨단장비 반입을 규제하는 미국의 제재에 맞서 자체 기술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다. 중국 경쟁사들은 기술을 탈취해 오는 대가로 많게는 수백억원의 연봉을 제시하며 우리나라 연구진 등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 유출을 시도하는 이들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다크웹을 사용하는 등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는 점도 우려스럽다.
이러한 기술 유출 범죄는 심각한 피해를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법에 명시된 형량에 비해 실제 선고되는 양형은 매우 낮다. 법원이 산업스파이에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원인은 턱없이 낮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 기술 유출 양형 기준은 기본 징역 8개월∼2년에 가중처벌을 한다고 해도 최대 4년에 그친다. 국외 기술 유출 역시 기본 형량을 1년에서 3년 6개월로 제시하고 있으며, 가중처벌을 하더라도 최대 6년으로 제한한다. 이는 산업기술보호법에 명시된 최고 형량(국내 10년·국외 15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지난해 선고된 영업비밀 해외 유출 범죄 형량 평균은 고작 14.9개월이었다.
여기에 감경 사유까지 반영한다. 초범이라고, 피해액 산정이 어렵다고 형을 깎아주는데, 감경 사유가 2개 이상일 경우에는 집행유예를 선고하게 돼 있다. 2019년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을 통해 처벌 조항을 대폭 강화했지만 정작 양형기준은 바뀌지 않았다. 양형기준이 법률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수조원 가치의 반도체 기술을 해외에 팔아 넘겼음에도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한다. 지난 10일 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설계도를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돼 구속 수감 중이던 전 삼성전자 상무 A씨의 보석(보석 보증금 5,000만원)을 허가했다. A씨는 2018년 8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 BED와 공정 배치도, 공장 설계도면 등을 부정 취득·부정 사용한 혐의로 지난 6월 기소됐다. 이는 삼성전자가 30년 넘게 쌓은 시행착오와 연구개발을 통해 얻은 자산으로서 최소 3,000억원에서 최대 수조원가치의 영업비밀로 평가된다.
미국·대만은 ‘간첩죄’로 간주해 엄단
산업스파이에 지나치게 관대한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으로, 해외 각국에선 선제적인 예방을 위해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스파이법을 여러 차례 개정해 국가 전략기술 유출을 ‘간첩죄’로 가중 처벌하고 있다. 피해액에 따라 최대 33년 형도 가능하다.
지난해 11월 미 연방법원은 미국의 항공우주 기술을 빼돌리려다 적발된 40대 중국인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지난 4월에는 중국 정부로부터 연구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은 사실을 숨긴 저명한 과학자가 가택연금 6개월과 벌금 5만 달러(약 6,490만원)를 선고받기도 했다. 유력한 노벨화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나노과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았던 찰스 리버 당시 하버드대학 교수는 캠퍼스에서 미연방수사국(FBI) 요원에게 체포되면서 사회적 평판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이후 1년 5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며 교수직을 잃었고, 미신고 세금 3만4,000달러(약 4,413만원)도 납부해야 했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대만도 지난해 5월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핵심 기술 유출에 경제간첩죄를 적용하기로 했다. 일본은 지난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첨단기술을 보호하고 공급망을 강화하는 내용의 경제안전보장법을 제정했고, 영국은 민간 기업 해외 인수합병을 강제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기술이 곧 경제이자 안보인 시대다. 한 번 탈취 당한 기술은 피해 복구가 어렵다는 점에서 첨단 기술 유출은 국가 전략 산업의 경쟁력 상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대로 허술하게 방치하다간 초격차 유지는커녕 핵심 산업 자체가 남아나지 못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