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라든 VC 밸류에이션, 낮은 값에도 투자자들은 ‘안 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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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빼는 대형 투자자들, 시드 단계도 내리막 돌입하나
얼어붙은 유동성에 ‘바늘구멍’ 된 투자유치, 기업들은 ‘버티기’ 돌입
10년 만에 최저치 기록한 엑시트 밸류에이션, 투자자는 ‘깎아서라도’ 현금화 원한다

VC(벤처캐피탈) 시장 침체가 1년 반 이상 이어지고 있는 지금, 밸류에이션(가치평가기준)이 바닥을 쳤다는 징후가 보이고 있음에도 VC 거래량은 반등하지 않고 있다. 글로벌 투자 전문 연구기관 피치북의 ‘2023년 3분기 미국 VC 밸류에이션 보고서’에 따르면 유일하게 성장세를 유지했던 시드 단계 밸류에이션도 곧 하락세로 바뀔 것이 예상되는 한편, 일부 중기와 후기 단계 기업은 아예 투자 라운드 유치를 미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엑시트(투자금회수) 밸류에이션 또한 일부 대형 기업의 IPO(기업공개)에도 불구하고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비전통 투자자들의 대거 철수와 낮아진 유동성이 시장을 정체시킨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8년 1분기~2023년 3분기 VC 시드단계 프리머니 밸류에이션 중앙값(2023.9.30 기준)/출처=PitchBook

시드 단계 밸류에이션도 ‘한파’

2021년 VC 업계의 기록적인 호황이 끝난 후 대부분의 투자 단계에서는 밸류에이션이 하락했지만 시드 단계에서만은 성장세가 이어졌다. 이는 2020년과 2021년 시장 환경이 스타트업 친화적으로 변화했을 때 대형 멀티 스테이지 투자자들이 비교적 유리한 거래 조건과 혁신 기술을 초기에 발견할 가능성 등을 이유로 시드 단계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시드 단계의 투자를 전면 중단했다. 시드 이후 단계에서도 유리한 조건으로 투자할 수 있게 되면서다. 이는 지난 2022년 이래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상장 가능성이 줄고, 금리가 오른 후 악화한 유동성과 자본비용 상승이 거래량을 위축시킴에 따라 투자자 간의 경쟁이 줄어든 결과다. 이같은 요인들은 신생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을 정체 및 하락시킬 가능성이 크다.

2018년 1분기~2023년 3분기 VC 프리머니 밸류에이션 중앙값(2023.9.30 기준), 주: 초기 투자 단계 기업(네이비), 후기 투자 단계 기업(민트)/출처=PitchBook

초기 단계는 정체, 후기 단계는 성장?

3분기에도 초기 단계 기업 밸류에이션의 정체가 이어졌다. 반면 후기 단계 밸류에이션은 두 분기 연속으로 상승했다. 초기 단계 기업의 프리밸류 중앙값은 다섯 분기 내내 4,000만 달러(약 518억6,000만원) 전후에 머물렀다. 지난 투자 라운드의 기업가치를 그대로 이어가는 플랫 라운드(Flat round)의 증가를 비롯해 투자자에게 치우친 가격 협상력이 높아진 투자 기준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피치북에 따르면 3분기 초기 단계 밸류에이션의 하한 사분위수는 사상 최고 수준인 2,390만 달러(약 312억1,340만원)로 상승했다. 이는 투자 안정성 요구를 맞추기 위해 VC들의 투자 기준이 더 까다로워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 후기 단계 기업의 프리밸류 중앙값은 지난해에 비해 15.1% 떨어졌지만, 분기별로 비교했을 때는 지난 2개 분기 동안 성장세를 보이며 6,300만 달러(약 822억7,800만원)로 상승했다. 2021년에 대형 투자를 받았던 기업들이 시장으로 돌아와 후속 라운드를 유치하며 분기별 프리머니 밸류에이션을 끌어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운라운드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분기별 수치가 높아진 것은 상당수 기업이 지난 투자 라운드보다 높은 밸류에이션에 후속 라운드를 유치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긍정적 신호지만 후기 단계 기업들의 거래 조건이 실제로 개선됐음을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다. 아직 비전통 투자자들의 참여율은 반등하지 않은 데다, 현재 시장 환경에서는 소수의 최상위 기업만이 투자 모금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소수에 들지 못한 기업들은 인원 감축과 비용 절감 등의 방법으로 현금 보유량을 최대한 보존하는 전략을 택했다.

2013년~2023년 VC 한 투자 라운드에서 다음 라운드 사이의 기간(연도) 중앙값(2023.9.30 기준), 주: 후기 투자 단계 기업(네이비), 성장 단계 기업(민트)/출처=PitchBook

불리해진 거래 조건에 투자 미루는 기업들

아울러 다음 투자 라운드 기간까지의 중앙값이 길어지면서 모금이 가능하더라도 투자 라운드 유치를 미루고 있는 경우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중기와 후기 단계 기업 중 마지막 투자 라운드를 높은 밸류에이션으로 모금했던 회사는 아직 은행에 남아있는 자본이 있어 사업 확장과 매출 강화를 통해 자체 현금 조달 구조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후속 투자를 미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경향은 2022년에서 2023년 사이 후속 투자 유치에 걸린 기간의 중앙값이 두 달 이상 길어지는 등 중기 단계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시장 상황의 변화로 투자자가 요구하는 지분이 높아진 것이다. 이들은 투자자에게 힘이 실리는 현재 환경이 개선되거나 과거에 받았던 높은 밸류에이션을 되찾을 수 있을 만큼 기업이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3년~2023년 VC 엑시트 밸류에이션 상승치 중앙값(2023.4.18 기준), 주: 상장(네이비), 인수(민트)/출처=PitchBook

엑시트 밸류에이션,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

유동성이 악화한 지금, 투자자들은 지분을 가진 기업들이 엑시트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엑시트하는 기업의 밸류에이션 상승치 중앙값은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올해 IPO를 진행한 스타트업 중 가장 기대를 모았던 식료품 배달 스타트업 인스타카트(Instacart)와 마케팅 자동화 플랫폼 클라비요(Klaviyo)조차 마지막 VC 라운드보다 낮은 밸류에이션에 상장하며 상승치 하락에 한몫했다.

인수합병(M&A) 역시 저조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도 여전히 일부 기업은 인수를 통한 엑시트를 결정하며 대다수 초기 투자자들의 선호를 나타냈다. 이는 2021년의 최고점에 마지막 라운드를 유치한 기업이라면 다운라운드로 엑시트하는 경우에도 초기 투자자는 유의미한 투자금 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