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테크 흐름 ‘역행’하는 韓, 이익 좇는 정치권과 찢어진 기술 혁신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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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두고 '몸 사리기' 선택한 정치권, 리걸테크 족쇄는 언제 푸나
잠잠한 국회 논의에 리걽테크 기업은 '답답'하기만
앞서 나가는 해외 국가들, "이대론 뒤처질 수밖에"
국회 내 스타트업 연구모임 ‘유니콘팜’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왼쪽)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오른쪽)의 모습/사진=강훈식 의원실

리걸테크를 사실상 허용하는 변호사법 통과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법안소위 단계에서 좌절됐다. 정쟁과 변호사 사정 봐주기가 국내 기업의 기술 발전을 가로막고 있단 비판이 쏟아진다. 국회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었다. 특히 유니콘팜 측의 반발이 거세다. 유니콘팜은 170만 명의 이용자를 확보하고도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타다’ 등의 혁신 서비스가 전통산업과의 충돌로 사라진 데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단 반성에서 출범한 초당적 의원 연구단체다. 이들은 현 상태가 지속될 경우 국내 기술 혁신은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좌절된 변호사법, 유니콘팜 “재논의 필요해”

국회 유니콘팜은 15일 리걸테크 산업의 족쇄를 풀 수 있는 법안이 법사위 법안소위 단계에서 좌절된 데 재논의를 촉구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앞서 법사위 법안소위에 오른 변호사법 개정안은 정보 비대칭이 심한 법률 시장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법률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폭넓게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변호사 광고 제한사항을 대한변호사협회(변협) 규정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하는 게 골자다. 법률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이 변협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으로, 사실상 ‘리걸테크 활성화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변호사법은 양당이 법안 논의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소위 의제로도 다뤄지지 않았다. 법안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측이 상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가운데 여당 의원들도 굳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초 민주당은 지난 8월 당 의원이 모두 참석한 워크숍에서 해당 법안을 ‘7대 민생 입법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며 처리 의지를 나타냈다. 박광온 당시 원내대표가 스타트업 관계자들과 만나 “타다가 많은 교훈과 과제를 남겼다”며 “민주당이 혁신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민주당은 변호사법을 직접 ‘혁신성장지원법’이라 명명하며 정기국회 때 최우선적으로 꼭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민주당이 갑작스레 태도 전환에 나선 건 내년 총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큰 선거를 앞두고는 ‘협회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정 이익집단을 대변하며 회원들의 표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각종 협회 등 직역단체의 뜻을 거스르면 선거에 불리하단 인식이 베이스로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2019년 12월 총선을 앞두고 택시업계 조직표를 의식한 의원들이 혁신산업을 죽이는 ‘타다 금지법’을 처리했듯, 다시 선거가 다가오자 직역단체 표를 고려한 의원들이 혁신산업을 살리는 법안 처리를 미루고 있다”고 전했다.

로톡 변호사 징계 취소에 기대감 높아졌지만

변호사법에 대한 기대는 상당히 높았다. 앞서 지난 9월 법무부가 로톡 가입 변호사 123명에 대한 변협의 징계를 모두 취소하면서 리걸테크 성장에 탄력이 붙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9일 법사위 법안제1소위에는 총 5건의 리걸테크 관련 법안이 상정돼 변협과 로앤컴퍼니(로톡 운영사) 간 열띤 토론이 벌어졌지만 법안 의결 절차는 진행되지 않았다. 법무부 징계위원회에서 변협 징계 관련 결론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여기서 징계위가 로톡의 손을 들어준 만큼 이제는 리걸테크 관련 법안을 막아낼 여력이 변협 측엔 거의 없었다. 리걸테크 활성화 법안을 발의한 한 의원실 관계자도 “당장은 국정감사 등의 이유로 법안 추진이 어렵지만 법무부 결정이 난 만큼 연말이나 내년 초쯤에는 법제화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한 바 있다.

법안 처리에 속도가 붙으면서 전문가들 사이의 논의도 점화됐다. 정신동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른 법을 개정하지 않고 변호사가 아닌 이가 유상의 법률 사무를 제공할 수 있게 하려면 리걸테크 산업에 관한 특별법이 필요하다”며 “대신 특별법이 서비스 이용자별로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법 개정 대신 특별법을 제정하는 배경은 법 개정도 제정만큼이나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개정해야 하는 법도 많다. 독일 법률서비스법이 변호사가 아닌 이도 기술을 이용해 유상의 법률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 분야는 채권추심, 사회보험 및 법정연금 자문, 외국법 자문 등 세 가지다. 현재 우리나라는 해당 분야를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외국법자문사 특별법 등으로 규율하고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 개정하기보단 특별법 제정을 통해 절차를 줄여야 한다는 게 골자다.

리걸테크와 변협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 영역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법률서비스법의 주무 부처를 법무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변협이 법무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단체여서다. 법무부가 법률서비스법의 주무 부처가 되면 변협과 리걸테크를 모두 법무부가 관리·감독할 수 있게 된다. 박재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률서비스법이 제정돼도 리걸테크 산업은 변협에서 그동안 감독해 온 부분과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며 “법을 만들 때부터 변협의 권한을 벗어나는 부분을 확실히 해줘야 리걸테크 업체들이 안심하고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발전하는 리걸테크, 흐름 가로막는 국회

그러나 결국 법안 처리는 유야무야됐고, 리걸테크 산업의 발전을 꿈꾸던 이들의 치열한 논쟁은 설레발에 지나지 않게 됐다. 이에 일각에선 정치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기술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대로 가다간 해외 기업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한 국내 기업들이 결국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미국은 리걸테크 산업의 가파른 발전을 이뤄내고 있다. 산업 초기엔 변호사 검색과 법률 정보 검색 분야가 주를 이뤘지만 이후 광학문자인식(OCR), 텍스트 분석 기술이 발전하며 전자 서명 및 법률 문서 자동 작성 등으로 서비스 범위가 확장됐고, 전자증거개시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법조계에서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미국변호사협회(ABA)는 변호사에게 기술적 역량 강화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고 있으며, 매년 테크쇼(TECH SHOW)를 개최해 법률 시장에 활용 가능한 기술 정보를 활발히 교류하도록 하고 있다. 기술 친화적 환경이 미국의 리걸테크 기술을 세계 최대 수준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독일도 제도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허용하며 산업 발전을 이끌고 있다. 국회도서관이 발간한 ‘최신 외국입법정보’에 따르면 독일은 리걸테크 기업을 종합적으로 안내하는 홈페이지를 통해 산업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 독일을 포함한 영국, 프랑스 등 다수의 유럽 국가는 변호사가 비변호사와 이익을 공유하는 형태의 사업 모델까지 허용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산업 발전을 적극 뒷받침하는 제도적 지원 아래 우리나라보다 인구수는 약 1.6배에 불과하지만 법률서비스 시장은 4~5배 큰 규모의 성장을 이루며 빠르게 발전 중이다.

일본도 우리를 앞서 나가고 있다. 일본은 2005년 변호사 광고 플랫폼 ‘벤고시닷컴’ 등장 이후 플랫폼 이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격론 끝에 ‘네트워크 사회에서 정보를 모아 판단하는 것이 국민의 상식이며 시장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지 고민하되 변호사 이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이용하는 방향’으로 플랫폼 허용을 결정했다. 이를 통해 벤고시닷컴은 2014년 IPO(기업공개)에 성공하며 성장 기반을 다졌고, 이후 다양한 리걸테크 신기술을 도입하며 혁신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리걸테크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미 해외에선 7,000여 개의 리걸테크 기업이 성장하고 있고, 상장 기업은 20개에 육박한다. 그러나 현재 국내 시장에서 리걸테크는 로앤컴퍼니가 유일하게 예비 유니콘으로 선정됐던 것을 제외하면 성과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기업 규모나 투자 규모를 살펴봐도 국내 리걸테크 산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리걸테크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거의 없다. 해외에서 격론을 펼치며 닦아 놓은 길을, 국내 정치권과 변협 측이 애써 무시하고 있는 탓이다. 아직 우리나라도 늦지 않았다. 규제가 해소되면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져 있던 국내 리걸테크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장이 열리게 된다. 당장의 총선에 얽매여 미래시를 저버린 정치권의 각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