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의 ‘CBDC 활용성 테스트’ 계획 공식화, “실물 경제 도입 이전 충분한 검토 이뤄져야”
'디지털 통화' 도입 속도 내는 금융 당국 기존 바우처 문제점 개선한 '디지털 바우처' 활용이 CDBC 실거래 테스트 핵심 다만 CBDC 도입 이전에 민간 및 금융 중개기관에 대한 파급 충분히 고민해야
금융당국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활용성 검증에 본격적으로 손을 걷어붙였다. 가상환경에서의 기술 실험과 실거래 테스트를 거쳐 CBDC 도입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하겠다는 복안이다. 다만 CBDC는 화폐 특성상 자칫 정부의 민간 통제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전문가들은 CBDC 도입 이전 정부의 충분한 사전 검토는 물론 민간 및 금융 중개기관의 CBDC 입법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CBDC 운용방향의 구체적인 청사진 제시한 금융당국
23일 한국은행·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3개 기관이 공동으로 ‘CBDC 활용성 테스트’ 세부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계획은 유관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확정한 테스트 대상 활용 사례와 참여 은행 선정 방향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CBDC 운용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번 테스트는 ‘가상환경에서의 기술 실험’과 ‘실거래 테스트’로 구분돼 실시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 당국은 가상환경에서의 기술 실험을 통해서 은행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미래 금융시장 인프라 구축 방안을 점검하는 한편, 실거래 테스트를 통해선 국민들이 새로운 디지털 통화의 효용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가상환경에서의 기술 실험과 관련해 금융 당국은 CBDC의 발행·유통 과정 등의 기술적 구현 가능성을 점검해 보는 것을 주안점으로 두고 세 가지 실험 계획을 선정했다. 첫째, 한국거래소와 협력해 CBDC 시스템을 외부 분산원장 시스템(탄소배출권 거래 모의 시스템)과 연계해 탄소배출권과 특수 지급 토큰(III형 통화) 간 동시결제(DvP)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지 확인할 방침이다. 두 번째는 금융결제원과 가상의 발행업자가 토큰화된 자산을 일반인에게 공모 형태로 발행하는 경우를 상정해 청약 신청 금액에 해당하는 예금 토큰을 처분 제한 조치한 후, 토큰화된 자산 배정량에 해당하는 자금만 실제 이체가 이뤄지게끔 하는 스마트 계약 활용 메커니즘을 테스트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BIS(국제결제은행)이 제시한 통합원장(Unified ledger)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자체적으로 CBDC 시스템 내 가상 증권을 디지털 형태로 발행한 후, 금융기관들이 해당 증권을 기관용 CBDC를 활용해 DvP하는 실험을 실시할 방침이다.
기존 문제점 개선한 ‘디지털 바우처’ 기반 실거래 테스트도 진행 예정
이번 테스트의 사실상 핵심인 CBDC 실거래 테스트는 기존 시스템을 개선(improving the old)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우선 새롭게 적용된 ‘디지털 바우처’ 기능이 실물 경제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현재 정부, 기업 등은 보조금, 상품권, 이용권 등 다양한 형태의 아날로그 바우처를 발행해 활용하고 있으나, 바우처 발행 과정에서 ▲높은 수수료 ▲복잡하고 느린 정산 프로세스 ▲부정수급 우려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금융 당국은 디지털 통화의 가장 큰 특징인 프로그래밍 기능을 통해 CBDC 기반 예금 토큰 등에 디지털 바우처 기능을 적용, 기존 바우처의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 실제 싱가포르 통화청(MAS)의 경우 디지털 바우처 도입을 통해 청구·심사·승인·대금 지급 등의 절차를 크게 간소화한 것은 물론, 최근엔 해당 기술이 교육지원사업 등에서의 부정수급을 방지한다는 점을 관련 실험을 통해 확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거래 테스트는 2024년 4분기 중 착수될 예정이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실거래 테스트는 ▲ 발행의뢰기관 의뢰로 은행이 디지털 바우처 기능이 부여된 예금 토큰을 발행 ▲ 이용자가 이를 이용해 사용처에서 물품 등을 구매 ▲ 사용처 앞 대금을 지급 등의 단계로 구성될 방침이다.
CBDC, 자칫 정부의 민간 통제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도
블록체인기반의 CBDC는 거래정보가 다수에 의해 분산돼 관리되는 분산원장 방식(Distributed Ledger Technology)을 따르는 만큼, 이를 활용하는 일반 경제 주체들은 시스템 내에서 금융기관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안전하게 자금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편의가 있다.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할 경우 중간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통화정책의 파급효과를 제고할 수도 있다. 가령 정부가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민간에 공적자금을 대규모 공급할 계획이라면, 시중은행 등의 금융중개기관을 거쳐야 하는 실물화폐가 아닌, CBDC를 민간에 직접 공급함으로써 빠른 시간 안에 통화 승수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CBDC의 위험성과 한계가 명확한 만큼 잠재적 문제점과 영향력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보완이 선행돼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CBDC가 중앙은행 및 정부의 민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는 지적이다. 앞서 살펴봤듯 분산원장 방식의 CBDC가 도입된다면 금융 경제에서 중앙은행과 자금 수요자 간 브릿지 역할을 해주던 민간 산업 은행 등 금융 중개기관의 기능이 대폭 줄어들거나 거의 필요 없게 되면서, 정부로 금융 시스템이 집중돼 고객들의 대출 및 신용 가용성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
또한 CBDC 거래자는 사실상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관리하는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데다, CBDC와 같은 디지털 처리의 경우 반드시 거래 관련 흔적이 전산상에 남게 돼 정부와 국민 사이의 수직적 익명성 보장이 어렵다는 분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다. 설령 정부가 수직적 익명성을 완벽하게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된다. 인터넷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불법 거래, 조세 회피, 자금 세탁을 정부가 통제할 길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좋건 싫건 정부는 수직적 익명성을 어느 정도 열어둘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정부의 민간에 대한 사생활 침해 문제 또한 피해 갈 길이 없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한 가상화폐 전문가는 “정부는 CBDC와 관련한 기술·방식·제도는 물론 한국은행, 은행법 등 관련 입법 보완도 세밀하게 검토하고 해당 화폐 도입을 추진해야 한다”며 “뿐만 아니라 CBDC에 대해 국민과 이해관계 금융사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고, 나아가 정부가 악용할 수 없도록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를 이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