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속 벤처투자 거품 빠지자 문 닫는 유니콘 기업 속출, “美 스타트업 위기”
올해 약 3,200개 美 스타트업 폐업, 누적 투자금 272억 달러 '휴지조각' 폐업 사례 쏟아지자 현지 업계선 건실한 초기 스타트업 '멸종’ 우려까지 ‘파두 사태’ 등 여파로 국내 유니콘 기업들 위상도 ‘추락’
지난해부터 지속된 고금리에 미국 스타트업들이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기업)에서 좀비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올해 10월까지 파산으로 휴지조각이 된 미국 스타트업 투자금만 약 35조원에 달하며 연말로 갈수록 그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현재 글로벌 VC 대다수가 기업의 비전보단 당장의 실적에 초점 맞춰 포트폴리오를 꾸리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국내 대표 유니콘들도 실적 악화로 미래 성장 가능성에 의구심을 야기하고 있다.
한때 기업가치 10조원 넘던 ‘호핀’ 등도 몰락
7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NYT)는 글로벌 투자 전문 연구기관 피치북의 데이터를 인용해 올해 약 3,200개의 스타트업이 폐업함에 따라 파산으로 날아간 투자금이 272억 달러(약 35조8,800억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NYT는 폐업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는 스타트업이 많아 실제 폐업한 기업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파산한 유니콘 중 대표적인 기업은 온라인 이벤트 플랫폼 스타트업 호핀(Hopin)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속 16억 달러(약 2조원) 이상의 자금을 유치했던 호핀은 한때 자산가치 76억 달러(약 10조원)로 평가 받으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팬데믹의 종언과 함께 비대면 시장이 활성화되자 가치가 급락했고, 결국 지난 8월 주요 사업을 1천500만 달러(약 200억원)에 매각했다.
한때 7억7,600만 달러(약 1조187억원)의 투자를 받으며 급성장한 스쿠터 회사 버드(Bird)도 올해 내내 주가가 폭락하며 지난 9월 뉴욕 증시에서 상장 폐지됐다. 상장폐지 당시 버드의 시가총액은 700만 달러(약 92억원)로 창립자 트래비스 밴더잔덴이 2년 전 매입한 마이애미 맨션(2,200만 달러)보다도 낮았다. 이 밖에도 누적투자금이 1억5,000만 달러(약 1,968억원)에 달하는 부동산 스타트업 제우스 리빙(Zeus Living)도 지난달 폐업했으며, 위워크, 올리브AI, 콘보이, 비브 등의 유니콘들도 잇따라 파산 신청을 하거나 폐업했다.
폐업 위기에 놓인 기업들이 늘어난 원인으론 지난해부터 지속된 고금리 속 누적된 금융비용과 추가 자금조달 실패 등이 꼽힌다. 피치북 관계자는 “높은 이자율과 불확실한 경제 환경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벤처투자 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위축됐다”면서 “여기에 올해 초 스타트업들에 유동성을 공급했던 실리콘밸리 관련 은행권마저 위기를 겪으면서 초기 단계 기업에는 자금 조달이, 후기 단계 기업에는 현금화 기회가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옥석 가리기 계속되는 VC 업계 “더 이상 미래가치 중요치 않아”
현재 미국 벤처 시장은 투자자들이 더 이상 스타트업 비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VC들마저도 옥석 가리기에 나서면서 일부 기업에 폐업이나 매각을 촉구하는 실정이다. 문제는 벤처투자 시장 위축이 오래 지속될 경우 최근 사업을 시작한 기업들의 몰락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장 성과를 내기 어려운 기술기업들은 지난 2년간 비용을 절감하며 대규모 실패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한 글로벌 VC 관계자는 “올해 들어 견고한 실적이 뒷받침 되지 않는 기업들을 포트폴리오에서 배제하는 VC들이 늘었다”면서 “더 이상 투자자들이 미래 가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기술 스타트업들은 성장과 수익을 동시에 이루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제언했다.
이는 실제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미국 온라인 증권서비스 업체 카르타에 따르면 올해 들어(10월 기준) 자사 플랫폼에서 최소 1천만 달러(약 130억원)를 모금한 신규 스타트업 중 87개사가 문을 닫았다. 카르타의 인사이트 책임자인 피터 워커는 “올해 폐업한 신규 스타트업이 수가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었다”면서 “올해는 스타트업에 최소 10년 만에 가장 어려운 해”라고 지적했다.
폐업 기업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2021년에 마지막으로 자금을 조달한 스타트업들이 추가 투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투자자들을 찾아야 하는 시점인 올해 연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스타트업들은 투자 라운드를 한 번 진행하면 최소 2년 동안 버틸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한다.
국내 투자 시장도 ‘혹한기’ 지속되긴 마찬가지
국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벤처·스타트업 업계도 지난해부터 이어진 고금리·고환율·고물가로 인해 ‘투자혹한기’를 겪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누적 벤처투자액은 7조6,874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5% 가까이 줄었다. 같은 기간 투자건수도 지난해 5,857건에서 5,072건으로 줄었고, 기업당 투자유치 금액도 25억9,000만원으로 6억3,000만원 감소했다.
국내 유니콘 기업들의 위상도 낮아졌다. 특히 지난달 반도체 설계기업 파두의 ‘뻥튀기 상장’ 논란을 계기로, 최근 차기 유니콘으로 꼽히는 AI 반도체칩 설계 스타트업인 퓨리오사AI의 시리즈 C 투자 유치 마감이 지연되고 있다. 이 밖에도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점치는 VC들이 대거 투자 집행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벤처투자 시장이 더욱 얼어붙었다.
이런 가운데 매출이나 영업이익 등 구체적인 실체 없이 기업가치가 부풀려진 유니콘 기업을 색출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국내 한 VC 심사역은 “실적이 과대평가된 유니콘들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페이퍼 유니콘이란 용어가 등장했다”며 “대표 유니콘들마저 정작 수익성이 개선되지 못하면서 미래 성장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는 투자자들이 늘어난 가운데 ‘제2의 닷컴버블’ 우려도 나온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의 ‘K-유니콘 육성 사업’은 이전과 다를바 없이 계속되고 있다. 중기부는 매년 ‘아기 유니콘’과 ‘예비 유니콘’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미래 유니콘’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실적이 부진한 기업들이 대상이 되는 문제가 빈번하다는 점에서 정책 개혁이 요구된다. 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최근 3년간 중기부가 선정한 예비 유니콘 55개사와 과기부가 선정한 45개사 중 지난해 영업이익이 발생한 곳은 총 23곳에 불과했다. 그 외 77곳은 적자 기업인 셈”이라며 “사적 시장에 투자자금 공급이 많으면 과대평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정부의 혁신벤처기업 육성 정책이 자칫 평가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니콘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냉철하고 신중한 접근과 집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