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은 ‘연구자 책임’?, 면피성 정책 남발하는 정부의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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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대통령 "R&D 효율화는 韓 도약시킬 거대한 힘"
연구자 책임 강조하면서 정부 책임은 '나몰라라', 뿌리 깊은 '면피'의 덫
"'선진국 추종자' 프레임 여전, 운 좋게 얻어걸릴 거란 생각 거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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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모습/사진=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R&D 예산 효율화를 강조하며 존 F.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인류 최초로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는 임무를 결단한 인물이다. 윤 대통령이 올해 R&D 예산 삭감으로 냉담해진 과학계를 찾아 케네디를 언급한 건 선진국을 따라가던 기존 R&D 관성을 도전·선도형 R&D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취지를 역설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케네디 대통령 거듭 소환, 尹의 본심은

윤 대통령은 5일 오전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 인사회’를 방문해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실 수 있도록 저와 정부가 온 힘을 다해 뒷받침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케네디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며 “여러분의 꿈, 여러분의 도전이 우리나라를 도약시키는 힘”이라고 힘줘 말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민간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케네디 대통령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의 여러 업적이 있지만, 문샷 프로젝트를 만든 것이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최대의 업적'”이라고 말했다. 문샷은 미국이 달을 보기 위해 망원경 성능을 높이는 대신 아예 달 탐사선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계획이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강한 결단력으로 과학의 진보와 혁신을 만든 케네디 대통령의 개척정신에 존경심을 표현해 왔다.

다만 과학계에선 윤 대통령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올해 R&D 예산이 지난해 대비 4조6,000억원(14.8%) 삭감돼 26조5,000억원 남짓밖에 편성되지 못한 탓이다. R&D 예산이 삭감된 해는 1991년 이후 33년 만으로, 특히 수조원의 예산 삭감은 과학계에 있어 초유의 사태다. 이 과정에서 윤 대통령은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R&D 시스템 개혁과 예산 삭감 필요성을 현장과 소통하지 못해 과학계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에 이어 이날 신년인사회를 찾은 배경도 과학기술계에 양해를 구하고 제도 개혁 필요성 등을 언급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R&D 소통 부족으로 문제가 격화하자 대통령실 산하에 과학기술수석실을 신설한다는 대책을 내놨다. 이날도 과학기술수석실 신설 계획을 재공언하고 소통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효율성 증대 내세운 尹, “유체 이탈 아니냐”

윤 대통령식 R&D 예산 삭감의 최종적인 목표는 효율성 증대다. 이와 관련해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R&D 나눠 먹기, 소액·단기 과제 뿌려주기, 주인이 있는 R&D 기획 등 R&D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낡은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최고 수준의 R&D, R&D다운 R&D를 수행하는 건강한 과학기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라고 윤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했다. R&D 예산의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 성장을 위한 구조개혁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과학기술계 내부에서조차 제기돼 왔다”며 “이 과정에서 연구 현장에서 우려하는 학생 연구원 등의 인건비 문제는 연구와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해결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에선 다소 어이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애초 R&D 예산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데는 정부의 책임도 분명 있을 것임에도 모든 책임을 과학기술계에 돌렸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특히 대통령실이 주장하는 ‘R&D 예산 갈라먹기 관행’, ‘과학기술 기득권층의 부당이득 편취’에 대한 볼멘소리가 크다. 이에 대해 한 연구원은 “실제 이권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면 이는 심각한 담합이기에 배제해야 할 사안”이라면서도 “다만 정부는 정부 연구비를 건네받은 과학기술계만을 죄인처럼 몰아가고 있다. 갈라먹기·나눠먹기로 예산을 배분해 준 기획재정부와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어찌 일언반구도 없나?”라고 쏘아붙였다. “정부 R&D 예산을 가장 많이 집행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도 묵묵부답”이라며 “사실상 정부 기득권층의 유체 이탈 아니냐”고 일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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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비판론 강화하는 정부, ‘정부 책임’은 없나

정부는 출연연구소에 대한 예산도 삭감했다. 출연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론적 시각에 기반한 결정이다. 그러나 분명 짚어야 할 것은, 출연연을 운영한 직접 경영자가 정부라는 점이다. 출연연이 실패했다면 출연연에 제대로 된 임무를 주지 못하고 예산과 인력을 통제하기만 한 정부의 책임이 클 수밖에 없다. R&D 예산 삭감 및 출연연 개혁은 분명 필요한 조치일 것이다. 이는 출연연 내부 인사들도, 과학기술계 측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책임만 떠넘기는 정부의 비겁한 모습에 분노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건 사필귀정이다.

결국 정부 차원에서 국가 R&D의 구조 자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 정부는 R&D에 대해 “연구자가 정부 연구비로 ‘할 수 있는 연구’만 하려 한다”고 비판하지만, 실패하면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도전적 연구를 포기하는 것을 무조건 연구자의 잘못이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연구’만 하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고 애꿎은 연구자만 다그치는 꼴이다.

과거 한창 발전하던 시기 우리나라가 주로 채택하던 방식은 여타 선진국에 인력을 파견해 기술을 배워오는 것이었다. 해외 한인 과학자들을 양성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만 오늘날엔 이미 배워올 만한 기술은 모두 배워온 데다 최근엔 기술 보호주의가 강화돼 타국의 기술을 끌어오기도 쉽지 않다. 이제 우리나라의 발전에 중요한 건 다름 아닌 독자적 기술 발전이다. 그러나 정부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적정한 투자를 통해 일정의 성과를 내야 하는 시대에서 개천에 용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단 의미다. R&D 예산 삭감 이면에 잠든 책임 회피의 원죄를 인식하고 뿌리 깊은 곳 남아 있는 ‘선진국 추종자’ 프레임을 벗어 던져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