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줄이고, 범위 좁히고” 정부 벤처 R&D 지원 격변, 업계는 ‘혼란’
중소기업 R&D 지원 예산 22.7% 감소, 지원 분야도 축소돼 민간주도·전략기술 등 특정 분야에 예산 집중, 벤처 업계 '비상' 멀쩡한 기업 무너지고 '좀비 기업' 태어난다? 시장 우려 가중돼
정부 벤처·스타트업 R&D(연구개발) 지원 정책의 커다란 변화가 감지됐다. R&D 지원 규모를 전년 대비 축소하고, △민간 중심 R&D △전략기술 분야 R&D △글로벌 혁신기업 R&D 등 핵심 분야에 예산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이 공개된 것이다. 16일 중소벤처기업부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2024년 중소기업 기술개발 지원사업’을 통합 공고한다고 밝혔다.
예산 전반 줄이고 ‘선택과 집중’
올해 정부의 중소기업 R&D 투입 예산은 1조4,097억원으로, 지난해(1조8,247억원) 대비 22.7% 감소한 수준이다. 줄어든 예산은 정부가 선정한 핵심 분야에 ‘일점사’ 형식으로 분배될 예정이다. 먼저 민간 중심 R&D에는 1,686억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특히 팁스의 경우 △일반형 807억원 △딥테크 팁스 394억원 등 총 1,201억원이 지원된다. 지난해(859억원) 대비 오히려 지원 규모가 증가한 것이다. 혁신기업을 위한 스케일업 팁스에는 지난해 대비 35.4% 많은 386억원이 지원된다.
전략기술 분야 R&D에는 621억원이 지원된다. 정부는 차후 12대 전략기술과 연계를 통해 △AI(인공지능) △자율주행 △항공·우주 등 비교적 파급효과가 큰 미래혁신 선도 기술을 지원하는 별도 트랙을 신설할 예정이다. 해외 인증, 수출 실적 등 글로벌 진출 역량을 보유한 혁신기업의 R&D 지원에는 267억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아울러 동일 목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개발하는 ‘경쟁형 R&D’ 방식도 신규 도입,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선별·지원할 계획이다.
이에 더해 정부는 차후 글로벌 진출을 목적으로 창업한 글로벌 스타트업 전용 R&D 사업을 추진하고, 중소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위한 글로벌 R&D 협력 거점도 조성하겠다는 방침이다. R&D 선정평가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유사·중복 지원 검증 체계를 강화하는 등 R&D 사업 운영 내실화를 위한 제도 개선도 추진한다.
“갑자기 지원 끊겼다” 벤처 업계 빨간불
정부의 R&D 지원 예산과 범위가 급감하자 벤처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정부 지원을 믿고 연구 투자를 이어오던 기업들이 순식간에 동력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공고에 따르면 예산 삭감 대상은 중소벤처기업부 R&D 사업 47개 중 24개에 달한다. 특히 삭감 대상 24개 사업 중 22개 사업의 경우 사업비 감액 폭이 자그마치 50%에 달한다. 나머지 2개 사업의 감액 수준은 각각 20%, 25%다. 예산 삭감 대상에 포함된 중기부 소관 R&D 과제는 4,000여 개에 육박한다.
업계는 정부가 사업 성과·필요성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무작정 예산을 삭감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애초 목적인 ‘R&D 예산 효율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과제별 진행 상황이나 중요도 등을 참작, 꼼꼼하게 ‘옥석 가리기’를 실시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산 삭감 소식을 접한 한 벤처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예산 타내기에 급급한 ‘좀비 과제’를 도려내려다 업계 전반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사업비 삭감 폭이 상당한 만큼, 차후 장기간 진행해 온 과제를 어쩔 수 없이 내려놓는 기업들이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실제 지난해 10월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이 R&D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 중 25%는 “연구개발비 감액 시 과제를 중단하겠다”고 답했다. 특히 예산 삭감으로 핵심 사업에 타격을 입은 기업의 경우, 단순히 과제를 포기하는 것을 넘어 시장 생존의 위협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핵심 분야 ‘좀비 스타트업’ 양산 우려도
일각에서는 정부의 ‘집중 지원’ 분야에서 좀비 스타트업이 양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 지원을 따내기 위해 껍질뿐인 사업을 영위하는 소위 ‘떴다방(단기간 부당이익을 취한 후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는 불법 영업행위)’식 스타트업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비 스타트업이란 이렇다 할 수익 없이 정부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스타트업을 일컫는다. 겨우 형태만 유지한 채 정부 예산을 지속적으로 타내고, 정작 혁신 시도는 하지 않는 텅 빈 사업체인 셈이다.
이처럼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돼야 할 역량 부족 기업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게 될 경우,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의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릴 위험이 있다. 특별한 생존 대책을 수립하지도, 리스크를 감수하지도 않은 채 그저 생존에만 집중하는 기조가 ‘좀비 바이러스’처럼 확산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당장의 기술력 확보 및 혁신이 절실한 전략기술 분야에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경우, 그 타격은 국가 경쟁력 차원까지 번지게 된다.
한편 업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제도 개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미 문재인 정부 당시 수백억원의 정부 지원금이 ‘좀비 기업 양산’에 활용됐던 전적이 있는 만큼, 차후 R&D 사업 내실화에 한층 힘이 실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좀비 기업의 등장을 막기 위해 보고서 중심의 페이퍼워크 요구를 줄이고, 보다 실효성 있는 ‘옥석 가리기’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