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일점사’에 밀려난 기초연구, 미래 동력 어디서 찾나
산업통상자원부, 고위험·차세대·대형 과제 집중 지원 방안 발표 특정 분야에 편중된 예산, 기초연구 지원 사업들은 폐지 수순 기초연구 없이는 혁신도 없다, 미래 성장 동력원 확보 방안 필요
정부 연구개발(R&D) 사업의 일점사 기조가 확산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8일 삼성전자 서울 R&D 캠퍼스에서 ‘R&D 혁신 라운드테이블’을 개최, 고위험·차세대·대형 과제에 무게를 실은 ‘산업·에너지 R&D 투자 전략과 제도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 예산이 성과가 명확한 과제 중심으로 배정된 가운데, 업계에서는 차후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흘러나온다.
특정 분야에 R&D 예산 ‘집중사격’
정부는 이번 방안을 통해 차후 보조금 성격의 R&D 투자를 전면 중단하고, 도전적 R&D에 지원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11대 분야 40대 ‘초격차 프로젝트’에 올해 신규 예산의 70%를 배정, 민관 합동으로 약 2조원(정부 1조3,0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산업 난제 해결을 위한 과제에는 약 1,2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하고, 실패 확률이 높은 고난도 프로젝트 지원 비중은 5년 내 10%까지 확대한다(현재 1%). 10대 게임 체인저 기술 확보(알키미스트 시즌2)를 위해서는 올해 내로 1조원 규모 예비타당성조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혁신 기업의 기술사업화 역시 집중 지원 대상이다. 정부는 올해 민관 합동으로 총 2조4,000억원 규모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펀드를 조성하고, 국가첨단전략산업 기술혁신 융자 사업을 신설하겠다는 방침이다. 첨단 전략산업 분야 중소·중견기업의 R&D 활동 보조를 위해 오는 2027년까지 총 3,900억원(잠정) 규모 초저금리 자금 융자도 지원한다. R&D 투자 촉진을 위해서는 올해 12월까지 한시적으로 일반 R&D 투자 증가분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10%p 상향할 예정이다.
대형·장기 투자 체계 중심으로 체제 개편도 실시한다. 소규모 기술 과제들이 파급력 있는 최종 대형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100억원 이상 과제 수를 지난해 57개에서 올해 160개로 대폭 늘릴 예정이다. 여기에 우수 기업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연구비 중 기업 현금 부담 비율을 인하(최대 45%p)하고, 과제 비공개·자체 정산 허용 등을 통해 기업 부담을 대폭 경감한다.
R&D 프로세스는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한다. 품목 지정 방식을 전면 도입해 기업과 연구자가 과제 기획을 주도하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혁신 역량이 뛰어난 기업과 연구 기관에 사업 운영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캐스케이딩’ 방식의 과제도 10개 이상 시범 도입할 예정이다. 아울러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 첨단산업 특성화 대학원을 현행 3개에서 11개로 대폭 늘리고, 인력 양성 예산도 2,294억원을 투입한다. 이는 전년 대비 232억원 증가한 수준이다.
뒷전으로 밀려난 기초연구 사업
올해 정부의 R&D 예산은 26조5,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4조6,000억원 삭감됐다. 정부 판단하에 불필요한 분야의 예산을 대거 감액하고, 핵심 분야에 예산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한 결과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부가 당장의 성과에 치중해 ‘기초 연구’를 외면하고 있다는 우려가 흘러나온다. 금전적 이득이 되는 연구, 단기간 내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만이 정부 지원을 받는 기형적 구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조는 ‘생애첫연구사업’ 폐지 결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애첫연구사업은 신진 기초학자의 첫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젊은 연구자들의 시장 정착에 중대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결국 정부는 이번 R&D 감액을 통해 젊은 기초연구 인력을 대거 내치고, 첨단·대규모 사업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다는 의미다. 문제는 기초연구가 모든 R&D 사업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다. 기초연구 역량이 부족할 경우 AI 등 첨단 산업 분야 역시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기초연구 투자는 오늘이 아닌 ‘내일’을 위한 투자다. 성과 중심 R&D 투자를 이어갈 경우 당장 수익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미래의 국가 성장 동력을 잃게 된다. 업계는 4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초연구 역량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진정한 R&D 효율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이익과 미래의 성장을 조율, 적절한 타협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