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C 깜깜이 모태펀드에 민간 이양 담론 재점화, 하지만 “한-미 상황 너무 달라, 준비 덜 됐다”
중기부, KVIC 출자사업 문제 지적 "시정하라" 몸집 대비 업무량 과중, 총선 전 속도전 감당 가능할까 민간 중심 생태계 재편 논의됐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
한국벤처투자(KVIC)가 모태펀드 출자예산 깜깜이 배정 문제로 중소벤처기업부의 개선 요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KVIC가 모태펀드 출자예산을 위탁운용사(GP)에 배정하는 과정에서 뚜렷한 기준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골자다. 다만 이 모든 걸 KVIC의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KVIC의 부담을 가중하는 예산 배정 체계 자체를 먼저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더 나아가 국내 VC 생태계의 중심을 민간으로 이양하는 방안을 고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KVIC 감사 결과 발표, “출자예산 배정에 문제 있어”
2일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중기부는 최근 KVIC를 대상으로 실시한 ‘2022년 종합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 결과 중기부는 KVIC에 △출자예산 배정 방식 개선 △’OO 모펀드’ 관리보수 수취 구조 개선 △지역·해외사무소 운영 부적절 등 총 15개의 처분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가장 중점적으로 지적된 부분은 모태펀드 출자예산 배정 방식이었다. KVIC는 1, 2차 심의를 거쳐 모태펀드 GP를 선정하고 출자예산을 배정하고 있는데, 1차 심의는 펀드 운용 및 준법성을 기준으로 한 서류심사, 2차 심의는 출자심의위원회(이하 출심위) 프레젠테이션으로 진행된다. KVIC는 1, 2차 심의 결과를 종합해 출심위에서 최종 선정 여부 및 출자 상한액을 결정한다.
이와 관련해 중기부는 “2021년 진행된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사업에서 KVIC의 출자예산 배정에 문제가 있다”며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GP의 요청액 대비 출자액을 높여 배정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KVIC는 13개 VC들이 신청한 500억원(약 3,800만 달러) 규모의 출자사업에서 1, 2차 심의를 거쳐 4개 GP를 선정했는데, 이들에게 출자예산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상위 2개 GP엔 각각 출자 요청액의 113%, 111%를, 나머지 2개 GP엔 각각 출자 요청액의 90%, 50%만 배정했다.
이외에도 △점수순으로 요청액 전액을 출자하고 남은 예산을 차순위에 배정하는 경우 △1순위 VC에 출자예산 전액을 배정한 후 차순위 VC는 예산소진으로 탈락 처리한 경우 등 사례도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현행 관리 규정 중 벤처투자모태조합 출자관리지침에 따르면 출자예산 배정은 높은 점수를 취득한 VC에 유리하게 이뤄진다. 그러나 중기부는 “출자액 조정에 대한 사유가 명확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출자예산 배정의 기준이 깜깜이 운영으로 이뤄지다 보니 합리성에도 의문이 든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중기부는 “출심위 회의록을 살펴보면 운용기관에 대한 출심위 의원의 질의·응답과 출자예산 배정 결과만 있다”며 “출자액 조정에 이르는 과정 및 사유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출자예산 배정 방식을 변경함에 따라 최종 선정기관이 변경될 여지가 크다”며 “특히 출심위 의장이 (KVIC) 대표로 돼 있어 대표의 의지에 따라 출심위의 권한이 남용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출자사업 선정결과를 공지할 때 기관별로 배정된 출자예산을 공개하고 출심위 회의록에 출자액 조정의 사유를 명확히 기록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총선 전 ‘속전속결’에 부담 가중, 형평성 우려도
종합감사 결과에 대해 KVIC는 “향후 출자사업을 공고할 때 예산 배정 등을 공고문에 반영토록 하겠다”며 지적을 수용하겠단 입장을 밝혔지만, 일각에선 KVIC의 부담을 가중하는 예산 배정 체계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KVIC의 몸집 대비 처리해야 할 업무 총량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 들어선 그간 예산이 줄어왔던 루키리그에 자그마치 1,000억원(약 7,60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이 배정되면서 치열한 경쟁이 부담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모태펀드의 경우 루키 분야의 지원 자격을 대폭 완화해 VC 지원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차 정시 출자사업에선 △설립 3년 이내 △운용 중인 모든 투자기구의 약정총액이 500억원 미만인 VC가 루키의 기준이었지만, 이번 사업에선 △ 설립 5년 이내 △약정총액 1,000억원 미만이 루키의 기준으로 설정됐다.
다만 이로 인해 역대 최다 수준의 지원이 이뤄졌음에도 오히려 심사 기간은 짧아져 업계 사이의 불안감도 늘었다. KVIC에 따르면 올해 출자 공고가 나온 이후 GP 선정 과정까지의 기간은 총 1개월 남짓이다. 이는 그간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사업 가운데 가장 짧은 수준이다. 이전까지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사업은 공고부터 GP 선정까지 약 3개월 이상 소요됐다. 지난해엔 1월 초 공고를 낸 이후 4월 말 GP를 선정했고, 2021년과 2022년엔 각각 전년도 12월 공고를 올려 3월 GP 선정을 매듭지었다.
정부가 올해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사업을 속전속결로 진행하고자 하는 건 총선의 영향이다. 오는 4월 치러지는 총선 이전에 GP 선정을 마쳐야 VC 생태계 회복에 마중물 역할을 했다는 성과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속도만 신경 쓰다 보니 사업의 형평성은 외려 저하할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VC 업계에서 모태펀드 자펀드의 감액 규정 손질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단 점도 부담이다. 앞서 벤처 업계 측은 자본잠식 기업이 유의미한 후속투자를 유치한 경우 후속투자 가치를 기준으로 관리보수를 회복할 수 있도록 관리보수 회복 수준을 현실화해 달라고 요구했다. 기존엔 관리보수 회복 수준을 ‘순자산가치×지분율’로 일괄 규정해 미래 기업가치 상승을 고려한 후속투자가 이뤄졌음에도 미미한 수준의 관리보수 회복이 이뤄져 유의미한 사후관리가 어려웠는데, 앞으로는 유의미한 후속투자가 이뤄진 경우 관리보수 지급 기준이 되는 투자 잔액을 후속투자단가로 산정하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중기부는 지난 1월 ‘손상차손 가이드라인’을 5년 만에 전면 개정하며 적극적인 반영을 도모했으나, KVIC는 짧은 기간 동안 모든 사항을 고려하며 사업을 진행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민간 펀드 목소리 나오지만, 민간은 “글쎄”
이에 일각에선 펀드 운영을 민간으로 점진 이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 중심 모태펀드 출자사업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단 것이다. 미국 VC 생태계를 모티브로 변화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단 의견도 있다. 업계에 따르면 미국 VC 생태계의 핵심은 ’50:50’이다. VC 투자와 엔젤캐피털 투자가 마차의 두 바퀴 축을 이루고 있단 의미다.
실제로 미국에서 VC는 주로 시드단계 투자 유치를 마친 시리즈 B, C 기업에 대한 후속투자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구조상 창업 초기의 스타트업엔 크게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여기서 창업 초기의 스타트업을 담당하는 주체는 엔젤캐피탈로, 엑셀러레이터(AC)가 주로 여기에 속한다. 특히 미국은 AC를 중심으로 창업자 간 네트워크가 구성돼 있어 보다 유기적인 투자도 가능하다.
반면 국내에선 AC의 비중이 VC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다. 정부가 AC 육성 지원을 가시화하며 반짝 증가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선 그나마 있던 AC 업계마저 잠식하는 모양새다. 과거 결성했던 투자조합 만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뚜렷한 회수 방안을 찾지 못하면서 돈맥경화가 심화한 탓이다. 민간 벤처모펀드 제도 마련에 대해서도 민간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싸늘한 분위기만 이어진다.
한 업계 관계자는 ” 이미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을 설립한 곳들이 적지 않은 데다 대내외적 불확실성에 영업현금흐름이 약화한 상황”이라며 “당장 미국과 한국은 상황이 너무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실 주도로 민간펀드 조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요구를 들어주는 데 기업들은 부담을 느끼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민간에서도 정부 중심의 ‘돈 뿌리기’식 지원 패러다임을 벗어나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현실의 벽이 아직은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