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라운드 택한 스타트업 증가세, 벤처 열풍 거품 빠졌나
울며 겨자먹기로 다운라운드에 나서는 스타트업들 파산 및 폐업 기업도 다수 속출, 투자자 손실 多 시장 분위기를 반전 시킬 열쇠, "정부가 쥐고 있다"
고금리로 인한 창업 시장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다운라운드에 나선 스타트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다운라운드란 기업이 후속 투자를 유치할 때 이전 라운드에서 인정받은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어 투자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2,0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 받은 기업이 후속 투자에서 그 가치를 1,000억 원 수준으로 낮춰 투자받는 식이다.
스타트업 중 20%, 다운라운드 선택
최근 미국 스타트업 고용 시장에선 칼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미 스타트업 업계는 신규 고용 규모를 전년 대비 반토막으로 축소했다. 1월 한 달 동안에만 1만8,000명 규모의 감원이 단행되면서 2022년에 채용된 직원의 32%가 회사를 떠났다. 최소 5년 만에 처음으로 신규 채용 인원보다 퇴직한 인원이 많았다. 카르타는 자사 플랫폼을 사용하는 초기 단계 IT 기업 4만3,000개사의 정보를 추적해 이같이 집계했다.
고금리 장기화로 투자자들 사이에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심리가 확산하면서 스타트업 업계는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카르타는 지난해 전체 조사 대상 스타트업 중 20%가 다운라운드를 택한 것으로 추정했다. 다운라운드 비율은 2018년 초 이후 최대다.
식료품 배달 앱 인스타카트, 다음 주 상장이 예상되는 소셜미디어(SNS) 플랫폼 레딧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스타카트는 상장 가능성이 처음 거론되던 2021년 당시 기업가치가 약 390억 달러(약 51조원)로 책정됐으나 작년 9월 실제 상장 당시 기업가치는 99억 달러(약 13조원)에 그쳤다. 레딧의 기업가치도 58억~64억 달러(약 7조6,000억~8조4,000억원)로 추정되는데, IPO 준비 과정에선 100억 달러까지 거론됐다.
쓰러지는 스타트업 증가, 투자자 손실도↑
파산을 택한 기업도 증가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벤처투자에 참여했던 투자자들의 손실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추세다. 최근 파산한 유니콘 중 대표적인 기업은 온라인 이벤트 플랫폼 스타트업 호핀(Hopin)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속 16억 달러(약 2조원) 이상의 자금을 유치했던 호핀은 한때 자산가치 76억 달러(약 10조원)로 평가 받으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팬데믹의 종언과 함께 비대면 시장이 활성화되자 가치가 급락했고, 결국 지난 8월 주요 사업을 1천500만 달러(약 200억원)에 매각했다.
한때 7억7,600만 달러(약 1조187억원)의 투자를 받으며 급성장한 스쿠터 회사 버드(Bird)도 지난해 내내 주가가 폭락하며 지난해 9월 뉴욕 증시에서 상장 폐지됐다. 상장폐지 당시 버드의 시가총액은 700만 달러(약 92억원)로 창립자 트래비스 밴더잔덴이 3년 전 매입한 마이애미 맨션(2,200만 달러)보다도 낮았다. 이 밖에도 누적투자금이 1억5,000만 달러(약 1,968억원)에 달하는 부동산 스타트업 제우스 리빙(Zeus Living)도 지난달 폐업했으며, 위워크, 올리브AI, 콘보이, 비브 등의 유니콘들도 잇따라 파산 신청을 하거나 폐업했다.
폐업 위기에 놓인 기업들이 늘어난 원인으론 지난해부터 지속된 고금리 속 누적된 금융비용과 추가 자금조달 실패 등이 꼽힌다. 이에 대해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피치북은 “높은 이자율과 불확실한 경제 환경이 몇 년간 이어지면서 벤처투자 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위축됐다”며 “여기에 스타트업들에 유동성을 공급했던 실리콘밸리 관련 은행권마저 위기를 겪으면서 초기 단계 기업에는 자금 조달이, 후기 단계 기업에는 현금화 기회가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초 벤처 열풍과 유사하단 우려도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최근의 벤처 혹한기가 벤처 거품이 터졌던 2000년대 초반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 열풍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벤처 붐이 불었다. 이 시기 벤처 열풍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인터넷의 등장과 1997년 외환위기가 중요한 배경이었을 것이라 분석한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초고속망이 깔리고 정보기술(IT)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도 성장동력을 여기에서 찾던 때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많은 연구개발 인재들이 대기업과 연구소에서 나오던 상황과 겹쳤다. 이후에 벤처 창업 붐이 일었다.
그러나 벤처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 3월 이후 미국 나스닥과 국내 코스닥의 잇따른 폭락 여파로 ‘닷컴 거품’은 빠른 속도로 붕괴했다. ‘벤처 한탕주의’, ‘묻지 마 투자’ 거품에 대한 자성도 일었다. 암흑기는 이후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2000년 1만 곳을 넘어섰던 벤처기업은 2005년께까지 줄곧 감소했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는 모태펀드 예산을 전년 대비 2,000억원 이상 삭감했다. 민간 중심 투자로 전환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시장은 정부 의도와 다르게 반응했다. 투자 혹한기에 모태펀드 예산까지 줄면서 벤처투자 시장이 더욱 얼어붙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시장 분위기를 반전 시킬 열쇠는 정부가 쥐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모태펀드 예산을 확대해 투자 확대 시기라는 시그널을 주고, 새롭게 추진하는 민간모펀드에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해 민간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