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배터리 부문 ‘선제적 사업 재편’, 자회사 SKIET는 ‘R&D 내재화’ 추진
맥킨지, SK 배터리 사업 진단 "SK온의 배터리에 셀 주력해야"
SKIET 등 배터리 소재 분야에 대해서는 "가능성 점검 필요"
SKIET의 R&D 독립도 재무적 구조조정의 일환이라는 시각도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사업 투자로 부채가 급증하면서 SK그룹이 배터리 사업에 대한 재검토에 나섰다. 지난달 28일 열린 SK이노베이션의 주주총회에서도 ‘사업 재검토’가 수차례 언급되면서 SK온이 추진하는 배터리 셀 사업을 중심으로 사업 재편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다만 SKIET 등 배터리 소재 분야 자회사에 대해서는 R&D 기능의 분리 등을 통해 경영 효율화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SK이노 산하 환경과학연구원, 그룹 R&D의 핵심기구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존 주력 분야인 에너지·정보통신기술(ICT)에 이어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를 그룹의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선언하고 오는 2026년까지 247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직물회사로 출발한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정유·석유화학을 그룹의 핵심사업으로 성장시켰고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現 SK텔레콤)을 인수해 ICT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래 주력사업으로 선언한 BBC의 세 분야 모두 그동안 SK그룹이 해오던 일과는 결이 많이 달랐지만 현재까지는 SK그룹이 재계 2위로 빠르게 몸집을 키우는 데 기여하며 그룹의 체질 혁신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SK그룹이 직물에서 석유화학으로, 다시 ICT에서 BBC로 포르폴리오를 확장하며 사업 체질을 바꿀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는 적기에 이뤄진 인수합병(M&A)과 함께 선도적인 연구개발(R&D) 전략이 꼽힌다. SK그룹의 R&D는 총수가 구상하면 전략·기획조직이 밑그림을, R&D를 맡은 SK이노베이션 산하 환경과학기술원이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실제 올해로 출범 41년을 맞은 환경과학기술원은 그룹의 미래 전략을 수립하는 컨트롤타워 조직과 연계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 왔다. 환경과학기술원은 그룹의 3대 신사업인 BBC 중 배터리와 바이오를 아우르는 ‘2B’를 탄생시켰으며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그린 포트폴리오’로 다듬어졌다.
SK그룹은 꾸준한 R&D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SK온, SK넥실리스,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로 구성된 배터리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SK 배터리 생태계의 중심에는 SK이노베이션이 있다. 환경과학기술원이 소속된 SK이노베이션은 정유·화학 부문 계열사를 거느리며 그룹에서 R&D 역량과 사업력을 겸비한 중간지주사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991년 울산 석유연구실에서 3륜 전기차 제작에 성공한 이후 배터리 연구에 착수해 1998년 리튬이온 전지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리튬이온 배터리 분리막(LiBS) 기술까지 확보한 후 SKIET와 SK온을 차례로 분사시켰다.
SKIET, SK이노 자산·인력 양수하고 R&D 기능 독립 추진
SK그룹의 배터리 밸류체인에서 리튬이온 배터리의 분리막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SKIET는 2019년 분사 이후에도 R&D 기능을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에 의존해 왔다. 이는 R&D 기능을 한 곳에 모아 연구 수행·관리의 효율성을 강화하고 시너지 창출을 도모한다는 SK그룹의 경영 기조에 따른 결정으로 그동안은 환경과학기술원 I/E소재연구센터와 R&D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운영돼 왔다. I/E소재연구센터는 양극활물질, 전해질, 분리막, 차세대 배터리 소재 등을 연구하는 조직이다.
SKIET는 2021년 기업공개(IPO) 이후 사세가 커지고 기술 경쟁이 심화하자 올해 R&D 내재화를 선언했다. 주도적인 R&D로 기술이 사업에 빠르게 적용되는 체제를 갖추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최근 SKIET 이사회는 SK이노베이션 산하 환경과학기술원의 I/E 소재 R&D 자산과 연구인력을 양수하기로 결의했다. 환경과학기술원 I/E소재연구센터이 자산과 인력들을 SK이노베이션에서 SKIET 소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SKIET가 양수하는 인력과 자산 등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며, 오는 5월부터 관련 내역이 재무제표상 유형자산으로 산입될 예정이다.
그간 SKIET도 자체 R&D 조직을 운영해 왔지만 원천기술은 SK이노베이션을 통해 개발했다. SKIET가 SK이노베이션에 R&D 과제를 위탁하고 그에 따른 비용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개발된 기술 등 무형자산은 모두 SKIET와 SK이노베이션이 공동 소유하고 있다. SKIET가 분사 첫해인 2019년 SK이노베이션에 지급한 연구개발비는 114억원이었다. 이후 2020년 245억원, 2022년 359억원, 2023년 258억원을 지급했으며 이는 전체 매출에서 4~6%의 비중을 차지한다. SKIET는 ‘R&D 내재화’ 조치에 대해 “회사의 꾸준한 성장세와 R&D 수행 역량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해 SKIET는 국내에 이어 중국과 폴란드로 생산거점을 확대에 세계 4위 수준의 생산능력(CAPA)을 확보하고 매출 6,500억원을 달성했다.
배터리 소재기업 SKIET·SK넥실리스, 향후 거취 주목
일각에서는 SKIET의 양수 결정이 SK이노베이션의 ‘사업 재검토’의 일환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지난달 28일 열린 SK이노베이션 주주총회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도 ‘사업 재검토’였다.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그동안 벌여온 사업에 대해 가능성을 점검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미래 핵심 성장동력인 배터리 셀에 투자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SK그룹은 지난해 말부터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를 통해 배터리 분야 사업 전반에 대해 진단을 받았다. 이와 함께 SK이노베이션과 9개 자회사에 태스크포스를 설치해 사업 경쟁력 강화 전략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맥킨지는 배터리 소재 사업에 힘을 빼는 대신 배터리 셀을 제조하는 SK온에 집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SK온은 공장 설립과 R&D에 7조원을 투입했다. 올해도 7조5,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터리 소재 분야까지 수천억원의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중 SKIET는 배터리 분리막을 생산하고 있으며 SKC의 자회사 SK넥실리스는 배터리 소재 중 동박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SKIET와 SK넥실리스는 시설투자에만 각각 4,940억원, 8,000억원을 투입했다.
이러한 기조를 고려할 때 앞서 언급한 SKIET의 ‘R&D 내재화’ 전략은 기술력 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대응인 동시에 사업 재검토의 관점에서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른 결정으로 볼 수 있다. SK는 이르면 다음달 맥킨지의 보고서와 자체 설치한 경쟁력 강화 태스크포스의 제안 등을 토대로 사업 재편 방향을 수립할 계획이다. 주력 사업에서 제외한 계열사로는 SKIET를 비롯해 윤활유 자회사 SK엔무브, 중국 EVE에너지와의 합작법인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회사 지분 매각이나 희망퇴직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사업 전망이 높은 자회사가 많아 당장 취할 수 있는 자금만 생각해 계열사를 매각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