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국 기업 환경이 벤처기업들의 무덤인 이유
캐즘(Chasm) 극복 난제, 전 세계 스타트업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
한국은 대기업들을 설득하기 위한 장벽이 타국보다 더 높은 것이 단점
글로벌 시장 진출이 더 빠르게 캐즘을 극복하는 도전이라는 시장 진단도
금융시장 경색이 장기화하면서 많은 스타트업이 폐업 절차를 밟는 중이다. 시리즈 B까지 투자를 받았던 서울 강남 일대의 한 스타트업도 지난 3월에 폐업 절차를 마무리했다. 회사 대표는 약 3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고, 투자사 여러 곳은 더 도전하지 않고 포기를 선택한 대표와 경영진들에게 불만이 많은 상태다. 해당 기업은 지난해 6월부터 회생절차를 알아보는가 하면 다양한 곳에서 자금 마련을 시도했으나, 자금난에 결국 직원들을 내보냈고 마지막에는 최초 창업진들마저 회사를 떠났다.
이는 흔히보는 스타트업의 폐업 수순이지만, 한때 연 매출액을 10억원 넘게 찍으면서 승승장구했던 스타트업이기에 더 아쉬운 점이 많다. 사업을 키우기 위해 시리즈 B 투자를 받았으나, 투자처에서 요구하는 사안들을 따라가기에 회사 인력은 너무나도 부족했고, 전문성이 뛰어난 인력을 뽑기도 쉽지 않았다. 창업진이 밤을 새어가며 노력했지만, 새로운 매출처를 뚫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해당 스타트업은 업계에서 일컫는 ‘캐즘(Chasm)’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표는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캐즘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을 표현했지만, 당장은 3억원의 빚부터 해결했으면 좋겠단다. 6년간 사업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대표의 지친 얼굴을 보면서, 투자금을 더 끌어와 주지도 못하면서 정작 회사를 접는다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벤처투자사(VC)에 대한 다른 폐업한 스타트업 관계자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캐즘(Chasm)을 넘지 못하는 스타트업
창업의 요람으로 알려진 실리콘밸리에서도 초기 성공을 계속 이어가는 스타트업은 드물다. 개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B2C)이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사업(B2B)이건, 초기에는 창업자 및 초기 경영진이 내놓는 상품이 시장에 없었던 제품이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매출액을 한번 내긴 어렵지만, 시장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제품을 내놓으면서 매출액 0달러를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초기 상품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은 시장의 주류가 아니다. 신기술 산업의 고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새로운 기술에 호의적인 고객들로 구성된 초기 시장과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까다로운 고객들로 구성된 주류 시장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캐즘이란 바로 이런 신산업 분야에서 도전하는 벤처기업들이 주류 시장으로 진출할 때 겪게 되는 난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초기 시장은 신제품에 호의적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사용하는 데 있어 따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고객들이다. 속칭 ‘이노베이터’, ‘얼리어답터’로 불리는 고객군은 뛰어난 기술 자체에 감동하며, 높은 성과를 얻기 위해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실수들은 관대하게 용서한다.
반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류 시장은 초기 시장과 전혀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주류 시장의 고객들은 의심이 많고 보수적이다. 이들은 신기술이나 신제품 자체에 감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기술과 신제품이 자신의 사업 성과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때문에 이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선뜻 도입하거나 구매하려 하지 않고, 신기술을 도입해 성과를 향상시켰다는 확실한 증거나 사례를 요구한다. 실수나 오류에도 관대하지 않다.
따라서 첨단기술 산업의 벤처 경영자들은 초기 시장의 성공에 절대 자만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 벤처 기업들은 자신만의 최신 기술과 뛰어난 성능의 제품으로 첨단 기술에 호의적인 초기 시장 고객들을 만족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때문에 사업이 성공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궁극적인 목표이자 규모가 큰 주류 시장의 고객들은 최신 제품보다는 시장에서 표준을 장악한 제품, 뛰어난 성능보다는 안정적인 애프터서비스를 선호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렇다 보니 초기 시장에서 효과를 발휘했던 마케팅 전략이 주류 시장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다. 뛰어난 성능의 신제품을 생산해 초기에 반짝 성장했던 많은 벤처기업들이 주류 시장 공략에 실패해서 파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캐즘(Chasm)을 넘을 수 없는 한국의 B2B 시장
벤처 기업들이 캐즘을 극복하고 주류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벤처 경영학에서는 무엇보다 주류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충고한다. 초기 시장에서 쌓은 명성과 업적은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주류 시장의 고객들은 자신과 비슷한 위상의 기업들을 비교 대상으로 규정하지, 초기 시장 고객들을 참조 집단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초기 시장에서 아무리 성공 사례가 많아도 주류 시장에서 실적이 없으면 고객을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벤처 기업들은 주류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방위적 마케팅을 벌일 수 있는 역량이 없는 만큼, 세분화된 목표 시장을 정하고 이를 집중 공략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성공 전략이 될 수 있다. 비록 소규모의 틈새시장이어도 일단 주류 시장에서 작은 성공 사례를 만들면 그 후 시장을 넓히는 데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주류 시장을 공략할 때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고객들이 단순히 하나의 제품보다는 제품과 관련된 부가 서비스, 예컨대 △설치 △시스템 통합 △교육 및 지원 △하드웨어 관리 등의 다양한 서비스를 포함한 완전완비제품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통상 기업이 고객에게 한 약속과 실제 제품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려면 그 제품은 반드시 다양한 서비스와 보조 제품이 결합된 완벽한 제품이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벤처 기업들은 특정 제품의 완성도를 높여 완전완비제품 수준까지 투자할 의지나 능력이 없어 캐즘에서 오랜 기간 정체하다가 시장에서 도태되기도 한다. 스스로 책임지기 어려운 부분들은 협력사나 전략적 파트너들과 제휴해 고객에게 완전완비제품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벤처 기업들이 캐즘을 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국가적 자원이 대부분 대기업과 정부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벤처 기업들이 뛰어난 제품을 만들고, 계속된 투자로 상품의 품질을 끌어올려도 대기업은 소비 패턴을 바꾸지 않는다. 완전완비제품을 만들어 공급해도 대기업들의 수익성이 대폭 바뀌는 가능성은 낮다.
국내에서 성공한 스타트업 대부분이 국내 투자사들의 투자금이 아니라, 해외 투자사들로부터 막대한 투자금이 투입돼 체급이 대기업 수준으로 올라섰던 곳들로 한정돼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쿠팡, 토스 등의 주요 스타트업들은 해외에서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의 투자금을 연달아 끌어오며 대기업들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자금력을 확보했다. 대기업들이 거꾸로 필요에 의해서 고개를 숙이고 찾아오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벽을 넘지 못한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폐업 절차를 밟는 것을 보면서 일찌감치 글로벌 시장을 도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면 한국 시장에서 힘을 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는 궁금증 아니, 확신은 국내 벤처 업계 관계자들이 내리는 공통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