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탈취 vs 자체 기술력, VCV 공법 두고 LS-대한전선 ‘강대강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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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대한전선' 피의자 전환, 사무실 압수수색 후 조사 착수
LS전선 “기술 탈취는 명백한 범죄, 모든 법적 조치 취할 것”
대한전선 “탈취 사실 無, 과도한 견제" 민형사상 조치 맞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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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사이클을 맞이한 국내 전선업계가 때 아닌 ‘기술 탈취’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국내 전선기업 1·2위를 다투는 LS전선과 대한전선 간 분쟁이 단순 의견 대립을 넘어 경찰 수사까지 확대되면서다. 이번 의혹은 LS전선의 초고압직류송전(HVDC) 공장 설계를 담당해 오던 가운건축사무소가 올해 대한전선의 해저케이블 1공장 건설에 참여하면서 촉발된 것으로, 양측 모두 이번 사건과 관련한 법적 조치를 예고한 만큼 갈등이 장기화할 전망이다.

경찰, 기술유출 의혹 수사 본격화

17일 업계에 따르면 경기남부경찰청 안보수사과 산업기술안보수사대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대한전선과 가운건축을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하반기 첩보 등을 입수해 혐의점을 인지하고 LS전선 관계자를 피해자 신분으로 불러 입건 전 내사를 벌여 왔다. 이후 경찰은 최근 가운건축과 대한전선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지난달부터 강제수사에 나선 경찰은 압수물 분석을 벌이며 사실관계를 파악할 전망이다. 앞서 경찰은 지난달 가운건축을, 지난 11일에는 대한전선 본사를 압수수색한 바 있다.

LS전선과 대한전선의 갈등은 해저케이블 VCV(Vertical Continuous Vulcanizing‧수직연속압출시스템) 공법 기술 탈취 의혹에서 비롯됐다. LS전선은 대한전선이 가온건축을 통해 LS전선 해저케이블 제조 설비 도면 등을 탈취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가운건축은 2008~2023년 LS전선 해저케이블 공장의 건축을 설계한 업체로 LS전선은 당시 가운건축에 압출, 연선 등 해저케이블 공정 설비들의 배치를 위해 각 설비의 크기, 중량, 특징 등을 명시한 도면을 제공했다.

가운건축은 올해 대한전선이 충남 당진에 준공한 해저케이블 1공장 건설에도 참여했는데 LS전선은 가운건축을 통해 해저케이블 제조 설비 도면과 레이아웃 등이 대한전선으로 유출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0km 이상의 해저용 HVDC 케이블을 만드는 글로벌 공장(LS전선 포함) 은 모두 다른 외형인 데 반해 대한전선 공장만 LS전선과 매우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LS전선은 또 대한전선이 가운건축에 먼저 연락해 여러 차례 설계를 요청했으며 계약금액도 LS전선의 2배가 넘는다고 전했다. 아울러 다른 협력사도 같은 설비 제작 및 레이아웃을 위해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고 밝혔다.

현재 LS전선이 유출된 것으로 추정하는 기술은 해저케이블 공장 1~4동 등에 적용한 제조 설비 도면과 배열 등이다. LS전선은 지난해 약 2,600억원을 투입해 강원도 동해 사업장에 아시아 최대 규모인 아파트 63층 높이(172m)의 해저케이블 생산설비 VCV 타워를 완공했다. VCV 타워의 높이는 해저케이블 기술력과도 직결된다. 성인 여성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케이블 표면에 묽은 절연체(폴리에틸렌·PE)를 균일하게 코팅하고 말리기 위해서는 케이블을 수직으로 떨어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압출된 PE가 무른 탓에 수평으로 작업할 경우 중력에 따라 아래로 처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VCV 타워는 굵기에 따라 짧으면 수십㎞에서 길게는 100㎞까지 케이블을 끊김 없이 뽑아 완성품의 품질을 높인다. 해저케이블의 경우 내부에 작은 거품이나 이물질이 있으면 폭발 위험이 커질 수 있는 데다, 바닷속에 묻히는 만큼 짧은 케이블을 여러 개 이어 붙이지 않고 수십㎞짜리 케이블을 한 번에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처럼 해저케이블 공장 건축 설계는 일반 공장 설계와 달리 연결점 없이 길고 무거운 케이블, 이른바 ‘장조장·고중량’의 케이블을 생산·보관·이동하기 위한 설비 배치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통상 500m~1km 길이로 짧게 생산하는 지중 케이블 생산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 업계에서는 그 자체가 기술력이기 때문에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장조장·고중량으로 인해 도로로 이송할 수가 없어 선박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공장에서 항구까지 이송하는 방법 역시 전선업계에서는 보안 사항에 해당한다. LS전선은 해저 1동부터 4동까지 건설하는 과정에서 수천억원의 R&D(연구개발) 투자와 실패 비용을 들인 만큼 이러한 제조 노하우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우려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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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LS전선 VCV 타워, (우) 대한전선 VCV 타워/사진=각 사

대한전선 “기술 탈취 강력 부인, 자체 기술력”

이에 대한전선은 2009년부터 해저케이블 공장과 생산 관련 연구를 진행했으며 당진 케이블 공장에 해저케이블 생산 설비를 설치하기도 했다며 탈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자체 기술력만으로 공장을 건설한 것으로, LS전선의 영업비밀을 가로채거나 활용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전선에 따르면 2011년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공장으로 꼽혔던 당진 공장의 VCV 타워 건립을 시작으로 2016년 이후 당진 소재의 기존 케이블 공장에 해저케이블 생산 설비(수직연합기, 턴테이블 등)를 설치했고, 해당 설비에서 내부망 해저케이블을 생산해 2017년부터 서남해 해상풍력 단지 등에 납품한 실적을 갖고 있다.

해저케이블 공장 레이아웃이 핵심 기술이라는 LS전선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공장의 레이아웃은 해외 설비 업체로부터 소정의 비용만 지불해도 구입할 수 있는 만큼, 핵심 기술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또한 대한전선은 이미 국내 최초로 지중케이블 VCV 타워를 구축해 수십년간 VCV 설비를 운영해 왔기 때문에 해당 기술을 탈취할 이유도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가운건축을 설계업체로 선정한 것에 관해선 공정한 경쟁 입찰 과정에 따른 결과라고 일축했다. 공장 설계 경험이 있는 다수의 설계 업체 중 정성·정량 평가를 통해 선정한 것일 뿐, LS전선의 주장대로 가운건축에 먼저 수차례 연락해 설계를 요청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LS전선의 이번 움직임이 경쟁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한 독점기업의 과도한 견제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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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사이클 맞은 ‘전선업계’, 제살깎아먹기 우려도

현재 양사는 수사 결과에 따라 소송전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낸 상태다. LS전선은 15일 “대한전선의 기술 탈취는 명백한 범죄행위”라며 “사실로 밝혀질 경우 국내외에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고, 같은 날 대한전선도 “만약 혐의가 없다고 밝혀질 경우 가능한 민형사상의 모든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법적 공방을 예고했다. 기술 유출 수사 특성상 시간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양사의 갈등은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업계에서는 양사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국가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해저케이블은 해상 변전소를 기준으로 내부망과 외부망으로 나뉘는데 현재 내부망은 양사가 경쟁하지만, 외부망은 LS전선만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서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이탈리아 프리즈미안(30%), 프랑스 넥상스(25%), 덴마크 NKT(15%) 등 해외 기업이 글로벌 해저케이블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점유율 한 자릿수에 머무르고 있는 국내 전선기업끼리 법적 분쟁을 벌이는 것은 실익이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두 회사가 생산능력(캐파)을 공격적으로 확충해 해저케이블 슈퍼사이클에 올라타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지리멸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고압 해저케이블 수요는 신재생에너지 가운데 하나인 해상풍력발전 확대에 힘입어 규모가 폭증하고 있다. 기존에 유럽 정부·기업을 중심으로 확대되던 해상풍력발전이 최근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는 AI 데이터센터 증가에 따라 북미 기업들도 러브콜을 보내면서다.

영국 원자재시장조사업체 CRU에 따르면 2022년 6조4,000억원 수준이던 글로벌 해저케이블 시장 규모는 연평균 16.1%씩 성장해 2029년에는 29조5,000억원에 도달할 전망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 해저케이블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지역들을 중심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처럼 해저케이블 수요가 쏟아지면서 세계 전선업계는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이했지만 우리나라는 빅2 기업의 갈등으로 해저케이블 산업에 대한 글로벌 경쟁력 및 시장 견제가 약화될 위기에 놓여 있어 업계의 고민도 깊어지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