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DS] ‘내로남불’의 시대, 60년 전 과학자의 태도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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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게너의 판구조론, 과학자들 저항 거셌지만 데이터 마주한 이들이 의견 바꾸며 학계 정설 돼
박사논문 뒤엎은 한 연구자는 세계 최고 지구과학자로 자리매김하기도
“틀린 것 인정하고 바로잡는 과학자들이 세상 바꾼다”

[해외DS]는 해외 유수의 데이터 사이언스 전문지들에서 전하는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았습니다. 글로벌AI협회(GIAI)에서 번역본에 대해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과학자들은 흔히 열정, 냉정함, 섬세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주의력,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 등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 같은 요소들은 일상생활에선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학적인 대화와 일상 대화 사이엔 큰 갭이 있고, 이는 과학자들이 흔히 대중과 소통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각에선 “과학적 글은 종종 나쁜 글”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과학자들이 써낸 글들이 정보를 전달하고 독자와 소통하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과학계의 특성이 우리의 행동 양식에 주는 교훈도 있다. 바로 ‘우리가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는 옳고 타인은 틀리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 같은 인식은 많은 시사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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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cientific American

지식의 진보, 오류 인정하는 과학자들이 이끈다

물론 모든 과학자들이 이렇게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새로운 증거와 주장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의견을 바꾼 과학자들이 분명 있었다. 판구조론(plate tectonics) 논쟁 당시 일부 과학자들이 보여준 태도가 한 예다. 지난 20세기 초 독일의 지구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는 대륙 이동설을 내놨다. 대륙이 지구 표면에 고정된 게 아니라 지구의 역사 내내 이동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베게너의 입지는 상당했다. 그는 기상학과 극지 연구에서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였다. 게다가 떨어져 있는 대륙들이 한때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증거로 드러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층서학 및 고생물학적 증거가 이미 다른 대륙 이동설에 영감을 준 상황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 사이 유럽과 북미, 남아프리카, 호주 등지에서 베게너의 주장을 놓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대다수 과학자는 그의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선 상당수 지질학자가 베게너의 이론을 부정했고, 지구물리학자들 또한 대륙 이동성을 부인하는 이론을 고집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들어선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패트릭 블랙켓(Patrick Blackett), 미국 프린스턴대(Princeton University) 해리 해먼드(Harry Hammond), 영국 케임브리지대(University of Cambridge) 에드워드 불라드(Edward Bullard) 등의 학자들이 대륙 이동설을 지지하고 나섰다. 1967~1968년을 거치며 이 같은 움직임은 판구조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으로 성장해 나갔다.

다만 컬럼비아대(Columbia University) 소속 라몬트 지질 연구소(Lamont Geological Laboratory)에선 계속해서 다른 주장을 펼쳤다. 지구물리학자 모리스 유잉(Maurice Ewing)이 이끄는 라몬트 연구소는 1950~1960년대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해양 지구물리학 연구소 중 하나였다. 당시 라몬트 연구원들은 미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해저에서 발생하는 열의 흐름과 지진, 수심 및 구조 등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시행했다. 이렇게 쌓인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라몬트 연구소는 새로운 판구조론에 끝까지 저항했다.

유잉이 대륙 이동설을 그토록 강하게 부인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유잉은 전기 공학과 물리학, 수학을 공부한 과학자였는데, 이 때문에 지질학적 질문엔 크게 매료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뿐이다. 또한 유잉은 베게너의 연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심지어 1947년 쓴 연구비 지원서에서 유잉은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을 언급하며 그의 이름을 ‘바그너(Wagner)’라고 쓰기도 했다. 

판구조론, 과학자들 논쟁 딛고 학계 정설 되기까지

지질학계에서 벌어지던 논쟁들에 대해 무지했던 건 유잉만이 아니다. 한 과학자는 1965년 “대륙 이동설에 대해 대충 알고 있다”고 답했고, 라몬트 연구원들은 “대륙 이동설에 회의적이고 냉소적이었다”고 회상했다. 한 해양학자는 유잉을 “해양학계의 패튼 장군(General Patt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전선 등을 이끌었던 미 육군 장군 조지 패튼(George Patton)에 빗댄 것으로, 패튼 장군은 불같은 성격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시기 유잉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굳건했던 유잉의 생각을 바꾼 이들 중 하나는 과학자 자비에 르 피숑(Xavier Le Picho)이었다. 1966년 봄 르 피숑은 지각 이동 가능성을 부정하는 내용의 박사 학위 논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주 미국 지구물리학회에서 발표된 라몬트의 데이터를 본 뒤 주저앉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내 논문의 결론이 틀렸다”고 말하며 술을 달라고 부탁했다.

르 피숑은 당시 논문에서 열 흐름 데이터를 사용해 ‘현무암 마그마가 해양 능선의 중간부 맨틀에서 치솟아 압력을 만들었고, 이 압력이 해저를 반으로 갈랐다’는 해리 헤스(Harry Hess)의 가설에 반박했다. 그러나 르 피숑이 확인한 새로운 데이터는 헤스의 가설이 맞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르 피숑은 자신의 해석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후 그는 에세이에서 “그 하루 동안 내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또 “새로운 증거를 거부하려고 애를 썼다”고도 했다. 

하지만 르 피숑은 좋은 과학자들이 할 법한 일을 했다. 자존심을 내려두고 연구소로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2년 만에 판구조론의 확립에 공헌한 주요 논문들을 써냈다. 그 결과 1982년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과학자 중 하나가 됐는데, 지구물리학자들 중에선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이 얻은 명예였다. 이후 르 피숑은 미국 지구물리연합 모리스 유잉 표창 등 수많은 상을 탔고, 당대 최고의 지구과학자 중 하나로 우뚝 섰다. 과학에서도, 인생에서도, 틀렸을 때는 인정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때때로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원문의 저자는 나오미 오레스케스(Naomi Oreskes) 미국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 과학사학과 교수입니다. 영어 원문은 Science Improves When People Realize They Were Wrong | Scientific American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