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美·동맹국에 공급해야” 거세지는 미국의 수출 통제 압박, 韓 기업 겨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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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HBM 역량, 미국과 동맹국 위해 활용해야"
미국의 HBM 수출 통제 움직임, 수개월 전부터 확인
네덜란드 등 동맹국, 대중국 제재 수준 높이며 통제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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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가 한국 기업이 생산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제품이 중국이 아닌 미국과 동맹국에 공급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에 대(對)중국 수출 통제 동참을 종용하고 나선 것이다. 시장에서는 미국이 중국의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보적 위협을 고려, 선제적으로 대중국 제재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美 산업안보차관, ‘HBM’ 직접 언급

앨런 에스테베스(Alan Estevez)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은 10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경제 안보 콘퍼런스에서 “중국이 미국과 동맹의 안보를 위협하는 첨단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에스테베스 차관이 언급한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 만든 고성능 메모리로, 주로 인공지능 가속기를 가동하는 데 쓰인다.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미국의 마이크론과 함께 글로벌 HBM 시장을 이끄는 ‘핵심 플레이어’로 꼽힌다. 

에스테베스 차관은 AI 기술이 군사 목적으로 이용될 경우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미국과 동맹국이 함께 이 문제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엔비디아의 AI 칩과 같은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중국이 구입할 수 없도록 제한, 중국의 대규모언어모델(LLM) 훈련을 막아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GPU의 핵심 부품인 HBM과 관련한 발언도 이어졌다. 그는 “세계에 HBM을 만드는 기업이 3곳 있는데 그중 2곳이 한국 기업”이라며 “그 역량을 미국과 우리 동맹의 필요를 위해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에서 확정한 것이 없어서 우리가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공식적으로 미국이 요청하면 그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 다만 그는 “관련 당국 간에 그런 이슈에 대해 미국이 협의를 요청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HBM 수출 통제 본격화할까

주요 외신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수개월 전부터 자국 및 동맹국 기업에 대중국 HBM 수출 통제를 검토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7월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중국 기업에 HBM을 공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중국 반도체 제재 방안을 공개할 수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특히 HBM3(4세대 HBM), HBM3E(5세대)를 비롯해 HBM2(3세대) 이상의 첨단 AI 메모리 및 이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장비 규제가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당시 블룸버그는 추가 제재가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기반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FDPR은 해외 기업이 만든 제품이더라도 미국 기술이 사용됐다면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규칙이다. 국내 주요 HBM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와 같은 미국의 반도체 장비와 케이던스, 시놉시스 등 EDA(전자설계자동화)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FDPR 기반 제재가 이뤄질 경우 충분히 수출 통제 범위에 들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업계는 해당 제재가 실제 시행된다 해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들 기업의 HBM 물량 대부분이 엔비디아, AMD 등의 미국 기업에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에서 8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며 대부분의 HBM 물량을 소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SK하이닉스는 HBM3과 HBM3E 8단을 사실상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역시 엔비디아가 중국 수출용으로 성능을 낮춰 개발한 GPU H20에 HBM3을 공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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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통제 동참하는 동맹국들

한편 미국의 수출 통제 압박은 이미 네덜란드 등 첨단 반도체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국가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19년부터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ASML은 글로벌 반도체 노광장비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인정받는 기업으로, 7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공정에 활용되는 EUV 장비를 사실상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한 시장 관계자는 “미국은 ‘ASML 보유국’인 네덜란드에 계속해서 대중국 수출 통제 강화를 주문해 왔다”며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EUV 장비 대비 기술 수준이 낮은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까지 수출 통제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히며 (미국의 수출 통제 동참 요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외신에 따르면 지난 6일(현지시간) 네덜란드 대외무역·개발협력부는 새 수출 통제 규정을 발표, ‘국가 안보’를 이유로 7일부터 심자외선 장비를 수출할 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리넷 클레버 네덜란드 대외무역·개발협력부 장관은 “기술 발전으로, 특히 현재의 지정학적 맥락에서 특정 제조 장비의 수출과 관련한 보안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며 통제 강화 이유를 설명했다. 해당 조처로 영향을 받게 되는 제품은 ASML의 트윈스캔(TWINSCAN) NXT:1970i, 1980i 심자외선 액침(immersion) 노광 장비 등 2종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 중국 정부는 즉각 불만을 표출하고 나섰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지난 9일 중국 상무부는 “최근 중국과 네덜란드는 반도체 수출 통제 문제에 대해 각급에서 여러 차례 소통 협의를 진행했다”며 “네덜란드가 지난해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이어 노광장비 규제 범위를 확대한 데 대해 불만을 표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몇 년간 미국은 자국의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안보 개념을 일반화하고 개별 국가에 반도체 및 장비 수출 통제 조치를 강화하도록 강요했다”며 “이에 따라 반도체 산업 공급망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관련 국가 및 기업의 정당한 권익을 손상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