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드 ‘자본 효율화’ 전략 꺼내든 WDC·키옥시아, 삼성·SK 호응 여부가 관건
선별적 투자·기술 혁신 강조하고 나선 WDC, "자본 지출 효율화해야"
업계선 회의적 의견, "시장 점유율 높은 삼성·SK 참여 없이는 어려워"
낸드 시장 회복세 지지부진, 삼성·SK 낸드 감산 기조 장기화하나
메모리반도체 업체들 사이에서 원가 절감을 위한 출혈 경쟁 대신 수익성을 보장할 수 있는 선별적인 투자와 기술 혁신을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부가가치 창출에 집중함으로써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해 낸드플래시 가격 회복세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미국 웨스턴디지털(WDC)과 마이크론, 일본 키옥시아 등이 호응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관건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참여 여부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한 양 사가 재차 점유율 확대 전략에 돌입하면 다른 업체들도 기술 경쟁력 강화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전략 구성에 시장 관계자들의 촉각이 곤두선 이유다.
자본 효율성 제고에 뜻 모은 메모리반도체 업체들
2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새로운 투자 전략을 갖추기 위한 준비 단계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화두를 던진 건 WDC다. 지난 6월 WDC는 3차원(3D) 낸드가 등장한 2017년 이후 연간 평균 설비투자 규모가 세 배 이상 증가했다며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자본 효율성이 점차 하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WDC에 따르면 2차원(2D) 시대 공정 전환에 따른 비트(bit) 성장률이 27%, 비용 절감률이 24%였던 반면 3D로 넘어온 뒤에는 각각 39%, 11% 증감했다. 공급 과잉이 발생할 여지가 커진 가운데 원가 절감은 어려워지면서 수익 창출 기반이 축소했다는 게 WDC의 설명이다.
이에 WDC는 단순히 출하량을 늘리는 대신 고객 수요에 맞춘 제품을 개발해 자본 지출을 효율화하자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첨단공정 전환을 늦추는 건 메모리반도체 업계의 일반적인 투자 공식을 역행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메모리반도체는 품질 차별화가 어려운 원자재적 성격이 강하다. 이렇다 보니 메모리반도체 제조 업체들은 생산 능력을 확대해 규모의 경제로 원가를 낮추고 선단 공정으로 한 번에 더 많은 용량을 생산하는 데 집중해 왔다. 업계 특성상 수익성 척도가 ‘첨단공정 전환 속도 및 규모’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엔 시장 환경이 바뀌었다. 낸드 시장 자체가 침체하면서 제품 가격이 하락한 탓에 첨단공정 전환만으론 수익성을 제고할 수 없게 됐다. WDC가 자본 효율화를 강조하고 나선 배경이다.
전략의 성과는 이미 나온 상태다. WDC와 키옥시아가 실적 개선을 이루는 데 성공한 것이 대표적이다. 올 2분기 키옥시아의 영업이익은 1,259억 엔으로 전 분기 대비 82% 증가했고, 영업이익률도 29%에 달했다. 키옥시아와 낸드 R&D와 생산을 통합한 WDC의 플래시 부문은 같은 기간 40%에 근접한 매출총이익률을 기록했다. 경쟁사보다 낮은 설비투자 지출로 감가상각비를 비롯한 고정비 부담이 낮은 비용 구조가 높은 수익성으로 이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처럼 일정한 성과가 나오자 캐시카우 D램을 보유한 마이크론도 WDC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모양새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5일 자사의 실적 설명회에서 “낸드의 기술 전환은 일반적으로 연간 bit 성장을 더 많이 제공하는데, 이는 낸드 bit 수요의 연평균성장률(CAGR)을 상회한다”며 “마이크론의 낸드 기술 전환주기가 더 길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향후 자본 투자가 완화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낸드 선단 공정 전환에 따른 출하량 증가세가 연간 수요 성장률을 넘어서는 만큼 통상 약 1년 6개월마다 이뤄진 첨단공정 도입 시점이 미뤄지고 나아가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 부담이 감소할 것이라는 얘기다. WDC가 내건 전략이 업계 내에서도 힘이 실리기 시작한 셈이다.
삼성·SK는 여전히 공정 전환에 집중
다만 WDC의 전략에 다소 회의적인 의견을 내보이는 이들도 적잖이 나오고 있다. 현재 메모리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양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정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만큼, 중·장기적인 관점에선 전략의 실효성을 상실할 여지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 열린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반도체 업계가 미리 시행한 생산능력 감축 영향으로 공급 확대는 제한적일 것”이라면서도 “1anm(10나노미터급 4세대 제품), 1bnm(10나노급 5세대) D램과 V7, V8 낸드 등 선단 공정의 공급 비중을 지속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같은 분기 “1anm, 1bnm 중심의 공정 전환을 지속할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이처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거듭 설비투자에 나설 경우 투자를 축소한 WDC와 키옥시아만 시장에서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낸드 감산 기조 이어지면 자본 효율화 전략에 힘 실릴 듯
변수는 낸드 가격의 더딘 회복세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21년 말부터 시작된 메모리반도체 업황 하락의 영향으로 낸드의 적자 폭은 점차 커지고 있다. 회복세도 완만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낸드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29% 늘어난 786억 달러(약 109조원) 수준에 머물 것으로 추산된다. D램 시장의 전년(906억7,400만 달러) 대비 증가 폭이 51%로 예상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양상이다.
이렇다 보니 업계 일각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타 업체와 속도를 맞춰 감산 기조를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이미 제품 라인업의 최적화 감산 계획을 시사한 바 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이 지난해 말 “낸드 업황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며 “시간을 두고 탄력적인 감산을 이어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양 사의 감산이 장기화하면 공정 전환 동기가 줄어들 수 있다”며 “WDC의 자본 효율화 전략에 더욱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