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독주’ SK하이닉스, 3분기 사상 최대 실적 달성하며 삼성과 격차 벌려
3분기 매출 17.5조원·영업익 7조원, 슈퍼 호황기 넘어서
HBM3E 12단 세계 최초로 양산, AI 칩 1위 엔비디아 납품
SK하이닉스 "AI용 HBM·낸드 등 고부가 제품 주력할 것"
SK하이닉스가 3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 강세로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판매가 확대되면서 실적이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리며 1위 자리를 수성한 가운데, 최근에는 HBM 최대 용량인 36GB(기가바이트)를 구현한 HBM3E 12단 제품을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 데도 성공했다. 해당 제품은 글로벌 AI 칩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에 납품할 예정으로, 당분간 SK하이닉스의 독주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3분기 실적, 컨센서스 상회하는 어닝 서프라이즈
24일 SK하이닉스는 올해 3분기 매출이 17조5,731억원, 영업이익은 7조300억원, 순이익 5조7,534억원으로 집계됐다고 공시했다. 매출과 영업이익, 순이익 모두 사상 최대 실적으로 시장 전망치를 큰 폭으로 웃돈 어닝 서프라이즈다. 매출은 직전 분기 기록한 16조4,233억원을 1조원 이상 넘었고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반도체 슈퍼 호황기였던 2018년 3분기실적(영업이익 6조4,724억 원, 순이익 4조6,922억 원)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다.
SK하이닉스는 “데이터센터 고객 중심으로 AI 메모리 수요 강세가 지속됨에 따라 이에 대응해 HBM,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등 고부가 제품의 판매를 확대했다”며 “특히 HBM의 매출이 직전 분기 대비 70% 이상, 전년 동기 대비 330% 이상 급증했다”고 말했다. 이어 “수익성 높은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판매가 늘며 D램과 낸드 모두 평균 판매단가(ASP)가 직전 분기 대비 10%대 중반 올라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거뒀다”고 설명했다.
내년 전망도 긍정적이다. SK하이닉스는 “생성형 AI가 멀티모달 형태로 발전하고 있고 범용인공지능(AGI) 개발을 위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투자가 지속되고 있다”며 “올해 들어 HBM, eSSD 등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성장세가 뚜렷해진 가운데 내년에도 이런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울러 AI 서버용 메모리에 비해 수요 회복이 더뎠던 PC와 모바일용 제품 시장도 각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AI 메모리가 출시되면서 안정적인 성장세에 접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SK 인수 후 지속적인 AI 투자로 HBM 시장 선점
이런 가운데 시장은 올해 SK하이닉스의 연간 영업이익이 삼성전자 DS부문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23조5,743억원이다. 반면 삼성전자 DS부문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는 평균 18조원대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후발주자였던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추월한 상황을 두고 AI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안목과 뚝심 있는 투자가 AI 메모리 1등 기업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SK그룹은 2012년 반도체 불황으로 생존의 기로에 있던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당시 하이닉스는 채권단 관리를 받으며 연간 2,000억원대 적자를 내던 부실기업으로 일각에서는 인수를 중도 포기했던 효성, 현대중공업, STX 등이 승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 직후부터 HBM을 비롯한 전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매년 조 단위의 연구개발(R&D) 비용을 투입했고 신규 공장도 잇따라 건설했다. 메모리 업황이 좋지 않았던 2012년부터 대부분 반도체 기업이 투자를 10% 이상 줄였지만, SK그룹은 투자를 늘리며 기술 개발에 몰입했다.
특히 투자의 방향이 탁월했다. AI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HBM, eSSD 등 AI 메모리를 제때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HBM 성공 신화는 인수 이듬해인 2013년 세계 최초로 실리콘관통전극(TSV)과 웨이퍼 레벨 패키지(WLP) 기술을 적용한 1세대 HBM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고성능 컴퓨팅 시장이 무르익지 않아 큰 반응은 없었지만 멈추지 않고 후속 기술 개발에 힘썼고 2022년 생성형 AI 등장 이후 IT 산업 중심이 AI로 옮겨가면서 10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SK하이닉스는 4세대 HBM3를 엔비디아에 공급하면서 AI 메모리 1위 업체로 발돋움했다.
각 분야 1위 ‘엔비디아·SK·TSMC’ 동맹 막강
파운드리 1위 TSMC도 SK하이닉스의 든든한 우군이다. SK하이닉스는 TSMC와 내년 출시 목표로 6세대 HBM4를 개발 중인데, TSMC는 HBM 전담팀을 꾸리고 초기 단계에서부터 수율과 성능 개선에 매달릴 정도로 열정적이다.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TSMC의 3자 동맹도 이점이다. AI 가속기 시장 1위 엔비디아는 엄격한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소수 기업에 주문을 몰아주는데, HBM3E 8단과 12단 모두 SK하이닉스가 독점적인 입지를 확보하고 있어 A100, H200 등 AI 가속기 성능이 향상될수록 SK하이닉스의 물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우위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최근 M7(매그니피센트7,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아마존닷컴·엔비디아·테슬라·메타)이 모두 SK하이닉스에 커스텀 HBM 관련 요청을 넣었고,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블랙웰도 4분기 출시를 앞두고 있어서다. HBM4부터 커스텀 제품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M7의 주문이 예상을 웃돌 것이라는 관측에도 힘이 실린다. 레거시 D램보다 웨이퍼 투입량이 3배 이상 많고, 적층 과정이 복잡한 HBM 특성상 비용이 최대 3~4배 이상 비싼 탓에 검증된 기업이 아니고서는 HBM 주문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메모리 1위의 왕좌를 내어줄 가능성이 커진 삼성전자는 뒤숭숭한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1993년 이후 30년 넘게 세계 메모리반도체(D램·낸드플래시) 시장에서 1위를 지켜왔다. 대부분의 신제품을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만들어 양산에 성공했다. 통상 D램은 전 세계 시장에 판매되기 전에 CPU 세계 1위 미국 인텔의 인증이 필요한데 이 과정도 삼성전자가 늘 첫 번째였다. 이러한 구조로 당시 후발 주자들은 삼성전자와 인텔이라는 메모리-CPU의 강자가 만들어 놓은 틀을 맞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최근의 HBM 시장은 다르다. 매번 인증을 주도했던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동맹을 뒤따라가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HBM3E 제품이 수율 등 성능 문제로 여전히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HBM4로 승부수를 띄운다는 전략이지만 HBM뿐만 아니라 D램 전반에서 경쟁력이 약화하고 있어 업계 안팎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한 메모리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30년간 1위만 해오던 삼성전자의 입장에서는 경쟁사의 틀에 맞추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