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자유 무역은 죽었다” 美-中 갈등 따라 움직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
반도체 업계 美-中 갈등이 좌우, 파운드리 1위 TSMC도 '곤혹'
일본·네덜란드·한국 등 美 동맹국들도 줄줄이 영향권
갈등 중재해야 할 WTO, 사실상 반도체 시장서 영향력 잃어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반도체 자유 무역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대만을 비롯한 각국 반도체 생태계가 눈에 띄게 들썩이는 양상이다.
美 대중국 규제에 휩쓸린 TSMC
26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모리스 창 창업자는 이날 TSMC 연례 체육대회에 참석해 “반도체, 특히 최신 반도체 부문의 자유 무역은 죽었다”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계속 성장할지가 우리의 도전”이라고 말했다. 대만 TSMC는 미국 빅테크 중심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으로, 인공지능(AI) 열풍과 미·중 갈등이 교차는 지점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평을 받는 기업이다.
실제 TSMC는 최근에도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로 인한 잡음에 휘말린 바 있다. TSMC 반도체가 중국 화웨이 제품에 탑재된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상무부가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TSMC는 화웨이 AI 칩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제품이 중국 비트코인 채굴 업체 비트메인의 계열사 소프고에서 출하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출하를 중단했다.
이후 미국 상무부는 TSMC의 미국 수출 통제 위반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확인했으나, 실제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언급할 수 없다고 밝혔다. TSMC의 대중국 제재 위반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는 의미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미·중 갈등에 ‘혼란’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미·중 갈등은 TSMC 등 민간 기업을 넘어 각 주요국의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유력 반도체 장비 제조사인 도쿄일렉트론을 보유한 일본의 경우, 미국으로부터 대중국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판매·유지 보수를 축소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이 반도체 장비 판매·유지 보수를 추가 제한할 경우 경제 보복을 가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업계는 중국이 자동차 제조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 공급을 차단, 도요타 등 일본의 완성차 기업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또 다른 동맹국인 네덜란드는 2019년부터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 수출을 통제 중이다. ASML은 글로벌 반도체 노광장비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인정받는 기업으로, 7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공정에 활용되는 EUV 장비를 사실상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이에 더해 지난달 네덜란드 정부는 EUV 장비 대비 기술 수준이 낮은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까지 수출 통제 범위를 확대, 대중국 규제 수위를 한층 높이기도 했다.
주요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사를 보유한 우리나라 역시 미·중 반도체 갈등의 영향권에 들었다. 앨런 에스테베스(Alan Estevez)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차관은 지난달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경제 안보 콘퍼런스에서 “세계에 HBM을 만드는 기업이 3곳 있는데 그중 2곳이 한국 기업”이라며 “그 역량을 미국과 우리 동맹의 필요를 위해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마이크론과 함께 글로벌 HBM 시장 ‘핵심 플레이어’로 꼽히는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정조준, 대중국 수출 통제 동참을 종용한 것이다.
WTO 제재는 ‘유명무실’
그런데 이 같은 분쟁 상황을 조정해야 할 세계무역기구(WTO)는 반도체 시장에서 사실상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각국의 반도체 보조금 경쟁은 바닥에 떨어진 WTO의 권위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WTO는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을 통해 회원국의 보조금 지급을 제한하고 있다. 국가가 직접 나서 자국의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할 경우 WTO에 제소를 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각 주요국은 WTO의 협정을 사실상 무시한 채 반도체 산업에 대규모 지원금을 쏟아붓고 있다. 미국은 2022년 제정한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인텔과 TSMC·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에 총 527억 달러(약 73조원) 규모 보조금을 제공한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되찾기 위해 구마모토의 TSMC 1공장 건설 비용 1조 엔(약 8조9,400억원)의 약 절반(4,760억 엔, 약 4조2,890억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TSMC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등에 업고 통상 5년 정도 걸리는 공장 건설 기간을 2년 수준까지 단축했다.
중국은 최소 270억 달러(37조4,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육성 펀드를 조성하며 반도체 굴기에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유럽연합(EU)은 독일 마그데부르크 지역에 360억 달러(49조8,700억원) 규모의 공장을 짓고 있는 인텔에 투자 비용의 3분의 1(110억 달러, 약 15조2,380억원) 규모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유럽 반도체 기업과 TSMC의 합작 법인에 투자금의 절반에 달하는 보조금을 제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