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파산] 스타트업 금융위기 – ① 부활하는 리먼 쇼크의 악몽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신용등급 A였던 견실한 은행의 충격적인 파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역사상 2번째로 큰 규모 Y 컴비네이터 CEO인 게리 탄 “스타트업 대량 멸종 수준의 사건” 시장은 다시 연준의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 반영 시작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가장 큰 은행 뱅크런 사건이 터졌다. 실리콘밸리은행(SVB)은 불과 3일 전에 Moody’s 신용 등급이 A를 기록할 정도로 신뢰받는 기업이었다. 포브스는 SVB를 “미국 최고의 은행”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3일 사이에 이 은행은 일련의 문제에 직면했고, 결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의해 문을 닫게 됐다.
문제는 SVB가 자본 확충에 실패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따라 온라인 뱅킹과 앱이 폐쇄되어 고객이 은행에서 돈을 이체할 수 없게 됐다. 이후 SVB는 곧바로 회사를 매물로 내놓고 지점과 ATM을 폐쇄했다. 현지 시각으로 금요일 새벽, SVB 파이낸셜 그룹의 주식 거래가 중단됐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SVB가 “매우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은행 중 하나라고 말했다. 각종 스타트업 대표들, 여러 애널리스트의 반응도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은행(SVB)의 CEO, CFO, CMO가 지난 2주 동안 총 440만 달러의 주식을 매각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은행의 최고기술책임자(CTO) 또는 최고정보책임자(CIO)의 주식 판매 여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부활하는 리먼 쇼크의 악몽
일부 언론 보도에서는 SVB를 소규모 지방 은행 취급하고 있지만, 작년 12월 31일 기준 총자산이 2,120억 달러로 러셀3000지수에서 16번째로 큰 은행이다.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본사를 둔 SVB는 전통적으로 스타트업 커뮤니티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주력해 왔다. 2020년에는 모금 활동이 급증하면서 예금이 크게 늘어 은행의 총예금이 2019년 617억 달러에서 2021년 1,892억 달러로 증가했다.
갑작스러운 예금 유입으로 인해 SVB는 2021년에만 617억 달러를 투자해야 했다. 2022년에도 10년물 이상 장기 채권 보유액은 860억 달러에 육박했다. 금리가 상승하면서 자금 대출 비용이 증가하여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이 더욱 어려워졌고 이는 결국 SVB의 예금 감소로 이어졌다. SVB의 리스크 관리가 미흡했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포트폴리오 대부분이 장기 주택담보증권(MBS)으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또한 같은 MBS가 원인이긴 하지만 리먼 쇼크 때와 다른 점이 있다. 당시엔 한층 더 시스템적인 문제로, 주택담보대출을 발행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까지 발행한 질 나쁜 신용이 원인이었다. 반면 이번 건은 MBS 자체보다는 SVB의 리스크 관리 미흡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금리가 상승하면서 기존 MBS 보유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여 SVB의 유동성 유지가 어려워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은 일부 단기 채권을 매각했으며, 이 과정에서 18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 손실 보전을 위해 유상증자를 발표하며 주식은 -60%까지 폭락했다. 예금인출이 정지되고 있다는 소문에 각종 VC가 SVB에서 예금을 찾아가려는 공황에 빠졌다. 캘리포니아 규제 당국은 금요일 늦게 실리콘밸리은행을 폐쇄하고 잔해를 연방 예금보험청에 넘겼다. 10일 미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이 SVB의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한 FDIC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SVB의 총자산은 2천90억 달러(276조원), 총예금은 1천754억 달러(232조원)에 달한다.
스타트업 대량 멸종의 신호탄?
고객들이 맡긴 예금이 25만 달러(3억3천만원)를 넘지 않으면 예금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이를 초과하면 보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FDIC는 SVB의 예금 가운데 25만 달러를 초과하는 금액이 얼마인지는 아직 특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SVB는 2022년 말 FDIC 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 규모를 1천515억 달러(200조4천억원)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총예금의 86%가 예금 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셈이다.
FDIC는 보험에 가입한 모든 예금자는 늦어도 2023년 3월 13일 월요일 오전까지 예금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25만 달러 이상의 계좌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잔액에 대한 법정관리 증명서를 받게 된다. 이 증명서는 SVB의 자산이 매각될 때 매각 대금의 일부를 청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은행의 자산을 매각하고 예금자를 포함한 채권자에게 매각 대금을 분배하는 과정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즉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자금이 25만 달러를 초과하는 계좌들은 돈을 받기까지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 ‘상당한 기간’이 재무구조가 약한 신생 기업들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급여다.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자금이 없으면 많은 스타트업이 직원들을 무급 휴직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문을 닫아야 한다. Y 컴비네이터의 CEO인 게리 탄은 이번 사태를 스타트업에 대한 “대량 멸종 수준의 사건”이라고 표현하며 혁신과 스타트업 생태계가 10년 이상 후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PitchBook에 따르면 벤처캐피탈의 지원을 받는 기업은 13만 개가 넘는다. 이 중 SVB를 이용한 스타트업은 약 65,000개에 달한다. SVB는 미국 테크·헬스케어 벤처기업 중 44%를 고객으로 두고 있어 이 예금 가운데 상당 부분은 스타트업의 자금에 해당한다. 이에 스타트업들이 돌려받을 수 있게 되는 예금 규모에 따라 이번 사태가 실리콘밸리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좌우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스타트업의 줄도산 우려가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정부가 25만 달러를 초과하는 사람들도 구제해 주기를 바란다”며 “SVB에 수천만 달러, 수억 달러의 자산을 예치한 이들을 안다. 이들이 25만 달러만 받는다면 회사는 전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25억 달러 초과 금액에 대해서는 SVB가 보유한 자산 매각을 통해서 지급되는데, 일단 SVB의 총자산은 2천90억 달러로 전체 예금 규모를 초과한다. SVB의 자산을 모두 매각했을 경우 예금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금액까지도 모두 커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SVB가 투자해 놓은 채권 등의 가치가 떨어져 매각한다 해도 당초 투자금을 100%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문제는 SVB 파이낸셜 그룹의 단발성 이벤트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현금을 조달하기 위해 큰 손실을 감수하고 증권을 처분해야 하는 다른 은행들도 많다.
2008년에 워싱턴 뮤추얼 은행이 파산했을 때 예금자들이 손실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당시 모든 예금 계좌는 19억 달러에 워싱턴 뮤추얼을 인수한 JP 모건 체이스로 이체됐다. 워싱턴 뮤추얼 은행에 예치된 돈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예금 보험도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트위터에서 일론 머스크가 SVB의 인수 가능성을 암시하는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금리 상승이 불러온 태풍
금리가 상승하면서 은행의 유동성 리스크가 계속 강조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SVB는 지난 목요일에 210억 달러 규모의 유가증권 매각을 발표하면서 “금리 리스크를 낮추려는 조치일 뿐만 아니라 고객 현금 소각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2월에 더 증가하여 예금이 예상보다 감소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SVB는 유가증권 매각으로 18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두 차례의 신주 공모와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22억5천만 달러의 자본을 조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공모는 이뤄지지 않았다.
채권 가격이 하락하고 해당 산업에 특화된 예금자들이 현금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금리 상승 환경에서 유가증권이 많고 대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차대조표의 조합이 유동성 문제로 이어졌다. 게다가 작년 4분기 자료를 살펴보면 SVB 파이낸셜이 보여준 것과 유사한 위험 신호를 보이는 은행이 많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SVB의 위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계정인 유가증권 미실현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면 우려가 더 커진다. 비앙코 리서치의 CEO인 짐 비앙코는 미국 은행의 미실현 손실이 1년 전 30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현재 6,520억 달러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퍼스트 리퍼블릭, 퍼스트 파운데이션, SVB 파이낸셜 등 미국 은행 3곳의 자산 규모는 한국의 상위 5개 은행과 비슷한 수준이다. 규모에 비해서 손실액을 감당할 수 없을 수준으로 키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타포괄손익누계액(AOCI)은 단순히 영업에서 나온 이익/손실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파생상품 손실, 정부 과징금, 부동산값 폭락 등 영업 외 손실을 포함한다. AOCI가 자기자본의 10%를 초과하면 은행은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줄여야 한다. 승수 효과와 AOCI에 포함되지 않은 충당금을 고려하면 이들 은행은 지금까지 대출한 금액의 30% 이상을 줄여야 할 수도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제출한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 연결재무제표(FR Y-9 C)에서 SVB 파이낸셜은 12월 31일 기준 누적 기타포괄손익이 마이너스 19억1,100만 달러라고 보고했다. 보고서에서 기타포괄손익누계액(AOCI)은 “매도가능증권의 미실현 보유 순이익(손실), 현금 흐름 헤지 누적 순이익(손실), 누적 외화환산 조정액, 누적 확정급여 연금 및 기타 퇴직 후 계획 조정액을 포함하되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라고 정의했다.
즉 SVB의 매도가능증권에 대한 미실현 손실이 대부분이었고, 결국 3월 8일에 매도가능증권을 ‘거의 전부’ 매각하면서 약 18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다른 은행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현재 은행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유가증권을 매각하여 막대한 손실을 실현하는 것뿐이다.
최근 FDIC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 은행이 좋지 않은 이자 마진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많은 은행이 SVB 파이낸셜과 유사한 위험 마진 경고에 직면해 있다. 그중에서도 12월 31일 기준 총자본 대비 마이너스 누적 포괄손익(AOCI) 비율이 가장 큰 은행은 ALLY 파이낸셜이다. 월요일 개장 전까지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음 타자가 누가 될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미 퍼스트 리퍼블릭의 주가도 크게 폭락하는 상황이다. 소규모 은행이라면 FDIC에서도 큰 부담 없이 자산을 동결시키고 예금자 보호 제도를 가동할 수 있을 테지만, SVB는 한국 5대 은행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은행이다. 아무리 미국이 큰 나라라고 해도 큰 은행이다. FDIC가 영업정지를 내리기 전에 자체 파산을 해 버리면 선량한 이용자들이 출금을 못 하는 데다, 청산 직전 급하게 자산을 매각함으로써 시장 가격을 폭락시키는 구조적 위험이 있는 만큼 선제적으로 영업정지를 명령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도 강 건너 불구경할 처지가 아니다. SVB의 파산 원인으로 꼽히는 금리 인상이 한국만 피해 가지는 않는다. 고정금리 채권을 대량 발행한 은행이라면 어느 국가라도 위험하다. 최근 신협이 고정금리를 인상한 사태를 보면 이해가 쉽다. 예금보험공사가 일정 금액을 보전해 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예금보험공사가 보장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으며, SVB와 같은 대형 은행이 무너지면 그 한계를 넘어 금융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상황은 보유 자산에 손실을 입히고 충당금을 쌓아야 하면서도 기록적인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는 국내 은행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