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주 ‘간편 대출’로 전락한 대지급금 제도, 회수율도 30%에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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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만든 '파산-재창업'의 굴레, "시스템 재정비 필요해"
재창업자=악덕 사업주?, "앞뒤 상황 구분 필요할 듯"
근로자 보호만 강조하는 정부, "'쌍방향' 패러다임 만들어 가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8월 28일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노동개혁 추진 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이정식 장관 페이스북 캡처

최근 대지급금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대지급금 제도란 근로자가 기업의 도산 등으로 인해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경우 국가가 사업주를 대신해 일정 범위의 체불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근로자의 생계 보호를 목적으로 마련된 제도지만, 정작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기업이 ‘재창업 자금’ 용도로 활용하면서 비판론이 불거졌다. 더군다나 대지급금 환수율도 30%를 채 넘지 않아 문제가 더 크다.

횡행하는 대지급금 활용 재창업

18일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정부에 대지급금을 변제하지 않고 새 사업을 시작한 사업장은 총 1,230곳에 달했다. 이들이 재창업한 업종은 음식 및 숙박업이 288곳(23.4%)으로 가장 많고, 그 뒤를 제조업 211곳(17.2%)과 도소매업 193곳(15.7%)이 이었다. 대지급금은 파산한 사업장에 대해 국가가 사업주 대신 근로자에게 일정 범위 내에서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로, 지급 금액은 차후 사업주가 5년 내에 갚아야 한다. 해당 제도는 임금을 떼인 근로자의 생계 보호가 주목적이지만, 재창업 자금으로 활용되는 등 악용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사실상 사업주들의 ‘간편 대출’ 창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대지급금 환수율도 30%를 채 넘기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지급금 환수율은 코로나19로 경기가 어려워진 2020년 21.1%가량이었는데, 이는 전년 24.8% 대비 3.7%p 낮아진 수치다. 이후 2021년 27.1%, 지난해 28.5% 등 조금씩 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지급액의 70% 이상은 미회수 자본으로 남았다. 부정수급 문제도 제기된다. 지난해 11월 한 목재 가공업체 대표는 대지급금 규모를 부풀려 부정하게 돈을 챙겼다 구속된 바 있다. 그는 지인과 브로커를 통해 허위 근로자 50여 명을 모집한 뒤 임금이 체불됐다고 신고해 대지급금 6억7,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수급이 적발된 사례 중엔 하도급업체 직원을 자기 직원인 것처럼 속이는 꼼수를 부린 경우도 있었다.

현재로서 대지급금을 받은 사업주가 재창업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문제는 재창업할 정도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국가에 변제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일부 사업주는 대지급금으로 직원 월급을 해결하면서 여러 차례 창업을 되풀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원이 지원을 낳는 ‘악의 굴레’가 형성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한 노무 전문가는 “밀린 월급을 세금으로 해결한 사업주가 곧바로 창업한다면 일반적으로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일종의 도덕적 해이가 벌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헐거운 대지급금 제도? “실제론 깐깐한 편”

이에 일각에선 대지급금 제도가 지나치게 헐거워 여러 구멍이 발생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대지급금 관련 부정을 들여다보면 일명 ‘브로커’를 활용한 부정수급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 지난 7월엔 허위 근로자 8명을 모집하고 사업장의 근로자들 6명에 대해서는 체불임금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근로자들이 간이대지급금 9,000여만원을 부정수급토록 한 사업자 A씨와 브로커 B씨가 임금채권보장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A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경영이 악화되자 간이대지급금을 사적으로 유용할 목적으로 B씨와 부정수급 범행을 공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장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대지급금 제도 자체가 다소 깐깐하게 운영되는 편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10월엔 고용노동부 차원에서 대지급금 제도를 개편하는 ‘임금채권보장법 일부개정법률 개정안’을 통해 대지급금 제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고용부는 “임금체불 사업주에 제공하는 융자금액을 1억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늘릴 것”이라며 “융자금은 체불 근로자의 계좌로 직접 임금되는 구조로 설계돼 사업주가 빌린 돈을 임의로 쓸 수 없는 만큼 제도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사진=Adobe Stock

“재창업, 대지급금 변제 위한 행위일 수도”

그런데도 대지급금 지급 후 재창업이 횡행하는 이유는, 재창업 자체를 대지급금 변제를 위한 경제 활동의 일환으로써 선택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대지급금을 받고 재창업했다는 이유만으로 ‘악덕 사업주’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법이 지나치게 근로자 위주로 구성돼 있어 사업자 악마화가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와 관련해 한 고용부 관계자는 “생존을 위한 일련의 노력 과정을 가로막는 건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결국 대지급금을 활용한 창업이 도덕적 해이인지 생존형 창업인지 사례별로 면밀히 살펴보면서 시스템 정비를 해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기업의 임금 미지급과 근로자 보호 제도 악용은 노사 간의 신뢰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근로자의 일탈행위 또한 신뢰 관계 구축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근로자가 제대로 일하지 않아 발생하는 피해는 대부분 기업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기업 또한 근로자의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의미다. 대지급금 지급 등 근로자 보호 제도를 구성함에 있어서도 이 같은 앞뒤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노사관계에서 발생하는 트러블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든 ‘쌍방향’ 구성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보다 면밀한 시스템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