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우주 등 중점 투자, 국가 R&D 예산 24.8조원으로 ‘2년 만에 원상복구’
과기부 ‘국가 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 발표
우주, 양자 등 예산 늘고 감염병, 수소, 미세먼지 줄어
“물가 상승률 감안 땐 실질 예산 오히려 삭감” 지적
정부가 내년 주요 연구개발(R&D)사업 예산안을 24조5,000억원으로 확정했다. 삭감됐던 예산이 2년 만에 복원되는 것이다. 올해보다 증가한 내년도 예산은 선도형 R&D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해 혁신 도전형 R&D 등에 집중 투자된다. 특히 3대 게임체인저 기술개발에 대한 집중 투자와 함께 우주 분야 첫 1조원 투자가 예고됐다.
‘R&D 예산’ 1년 만에 복구, 3대 게임체인저 집중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7일 열린 제9회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에서 ‘2025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내년도 주요 R&D 예산안과 관련해 “과학기술혁신본부 편성 시점 기준으로 역대 최대 규모”라며 “올해 21조9,000억원 대비 13.2% 늘어나는 것으로, 내년도 정부 총예산 증가율이 4% 선으로 예측되는 것을 감안하면 재정 여력이 없는데도 최선을 다해 큰 폭으로 증액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년도 주요 R&D 예산은 이달까지 검토된 예산인 24조5,000억원과 이후 진행될 예비타당성조사 통과 사업, 다부처 협업 예산 등 3,000억원 규모를 포함한 것이다. 과기부는 “반영이 예정된 3,000억원은 기획재정부와 이미 협의를 마쳐 사실상 확정된 금액”이라고 전했다.
내년도 R&D는 정부가 3대 게임체인저 기술로 꼽은 인공지능(AI)·반도체, 첨단바이오, 양자 분야 투자에 집중한다. AI·반도체 R&D에 1조2,000억원, 첨단바이오에 2조1,000억원, 양자 기술에 1,700억원을 투입한다. 차세대 AI와 AI 반도체 투자를 확대하는 한편, 첨단바이오는 디지털 바이오 육성 기반과 바이오 제조 핵심 기술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양자 기술 분야는 국내 연구 생태계 내실 강화와 양자 핵심 기술 확보에 투자한다.
기초연구에는 올해보다 11.6% 늘어난 2조9,400억원을, 올해 새로 도입한 ‘혁신·도전형 R&D’ 분야에는 약 1조원을 투입한다. 올해 대규모 예산 삭감 사태를 겪은 정부출연연구기관에는 2조1,000억원을 지원한다. 올해 대비 1조8,800억원(11.8%) 증액된 것이다. 2023년 2조400억원과 비교해 600억원 늘었다.
박 수석은 “일반 R&D 예산 등이 추가되면 2025년도 정부 R&D 총규모는 30조원에 육박할 것이 확실시된다”며 “우주항공청 개청과 함께 내년도에는 우주 분야 예산이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하며 미래 원전산업을 선도하고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SMR), 4세대 원전 등 차세대 원자력 기술에 대해 2023년도 대비 2배 이상 늘려 편성했다”고 했다.
깎은 만큼 복구하고는 “역대 최대 증가” 비판
과학기술계에서는 R&D 예산이 복원되자 한숨 돌린 분위기다. 올해 갑작스런 예산 삭감에 연구 현장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내년 예산이 복구되면서 상처를 보듬을 기회가 생겼다는 평가다. 하지만 삭감 전 예산(2023년 24조7,000억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라, 줄어든 예산으로 중단 위기에 놓인 계속과제 복원 등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란 지적이 나온다.
또 눈에 띄는 부분은 올해 대규모 예산 삭감의 소나기를 피한 분야 대부분이 내년에도 예산 증액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일례로 정부가 공개한 ‘분야별 투자규모 상세 내역’ 일부(18조7,000억원 규모)를 보면, 이차전지는 2023년 1,100억원에서 2024년 1,400억원, 2025년 1,800억원으로 3년 연속 증액됐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도 6,400억원→6,600억원→8,100억원으로 늘었다.
반면 올해보다 소폭 증액(각각 8.9%, 7.7%)되는 수소(2,500억원)와 탄소중립(2조2,000억원) 분야의 경우 예산 삭감 전인 2023년(각각 2,700억원, 2조4,000억원) 수준을 회복하진 못했다. 올해 7.8% 삭감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예산은 2조1,000억원으로, 2023년 수준(2조400억원)을 소폭 웃도는 정도다. 올해 신설·증액된 예산을 감안하면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분야 예산은 올해 6조7,400억원에서 내년 6조1,000억원으로 줄게 되는데, 이들 분야의 2023년 예산은 이보다 2배 이상 많은 13조3,400억원이었다.
게다가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면 내년 예산은 삭감 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정부 출연연인 한국천문연구원 출신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3년(3.6%)과 올해(2.6%), 내년(2.1%·예측치)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 예산은 (삭감 이전인) 2023년 24조7,000억원에 견줘 오히려 4.2%가 내린 23조7,000억원에 불과하다”며 “역대 최대 규모라고 자화자찬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과학계 의견보다 대통령 한마디 우선되는 일 다신 없어야
당초 올해 R&D 예산 삭감을 단행했던 이유로 정부는 R&D 예산 증가폭만큼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그 이면에서 소규모 나눠먹기식 지출이 행해졌다는 점을 들었다. 정부가 이 같은 입장을 정한 배경엔 윤석열 대통령의 ‘이권 카르텔 타파 천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28일 열린 재정전략회의에서 R&D 예산의 집행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나눠먹기, 갈라먹기식 R&D 예산은 완전히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의 언급 이후 R&D 예산 삭감이 단행되자 과학계에서는 즉각 반발 기류가 형성됐다. 이런 기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올해 2월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벌어진 ‘입틀막’ 사건이다. 윤 대통령이 현장에서 축사를 낭독하는 동안 졸업생 한 명이 과학기술 분야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소동을 벌인 것이다. 해당 졸업생은 곧바로 경호원들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힌 채 강제로 행사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긴 했으나 당시 경호처 행위와 경찰의 과민한 대응은 여론의 비판을 불러 일으켰고, 나아가 윤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한 번 더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에 대통령실은 올해 총선을 앞두고 부정적 여론을 바꿀 요량으로 “내년도 R&D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하겠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정부가 각의를 통해 예산 관련 지침을 마련하면서 내년도 R&D 예산을 작년 수준으로 환원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 역시 사실상 그 연장선상의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내년도 R&D 예산 규모를 복원하면서 혁신·도전형 연구와 인공지능(AI), 첨단 바이오, 양자 등의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 여전히 아쉬움은 남지만 R&D 예산을 이전 수준으로도 복원시키기로 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단 최악은 면하게 됐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이번 결정은 씁쓸한 뒷맛을 안긴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대통령 한마디 말에 우왕좌왕하는 행태가 정부의 과학기술 R&D 지원 의지에 대한 신뢰를 의심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향후 예산 집행 과정에서 또다시 과학계의 의견보다 대통령의 돌출 발언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