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피 말리는 ‘기술 유출’, 정부 부처 대응에도 속수무책
기술 유출 주요 타깃 된 우리나라, 각 부처 대응에도 ‘핵심 기술’ 새어나간다 기업 인식 부족, 까다로운 현행법으로 인한 솜방망이 처벌 등 문제 해결해야 국내 대기업과의 유출 분쟁에도 쩔쩔매는 중소기업, 정부 차원 대처 필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며 세계 각국이 기술 우위 선점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 중 기술 후발국은 신속한 시장 개입, 개발 리스크 완화 등을 위해 경쟁국 M&A·핵심 인력 영입 등 기술 탈취 유형을 다각화하는 추세다. 특히 기술·제조 현장의 디지털 전환, FTA 등 국가 간 교류 확대 등으로 인해 기술 및 인력 유출이 용이한 환경이 조성되어 그 위험성이 한층 커졌다. 반도체, OLED, 2차 전지, 조선 등 주력 업종 기술을 다수 보유한 우리나라는 기술 유출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유출의 원인
우리나라에서 2018년 이후 5년 동안 해외로 유출된 첨단 기술은 총 83건에 달한다. 이 중 33건은 국가 안보 및 국민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핵심기술이었다. 피해 집단별로는 중소기업이 44건(53.0%)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대기업 31건, 대학·연구소 8건 순이었다. 업종별로는 69건(83.1%)이 반도체·전기전자·디스플레이·자동차·조선·정보통신 분야였다.
국가핵심기술의 유출 원인으로는 국가핵심기술 보유 여부에 대한 인식 부족, 기술보호 제도 미인지 등이 꼽힌다. 국가핵심기술 보유 여부 확인은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관의 자발적 판정 요청 △수출 및 해외 M&A 신고 △승인 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복잡한 절차에 대한 안내가 부족해 기업이 보유 여부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정부 허가 없이 기술자료를 해외에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현 산업기술보호법의 한계로 인한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관의 무차별적 M&A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각 부처의 대응책
정부 각 부처는 기술 유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먼저 중기부는 피해 기업에 기술 유출·분쟁 피해 조사 및 전문가(법률) 상담, 기술보호지원제도 및 정부 부처 연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보호지원반’을 가동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합의 하에 핵심 기술자료를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에 보관하는 ‘기술임치’ 제도도 운영한다. 기술임치 제도를 활용하면 기술 개발 사실 및 보유 시점을 입증할 수 있어, 내·외부 기술 분쟁이 발생할 시 임치 자체를 개발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중기부는 기술보호 역량 실태조사, 법률 자문·상담, 법무지원단, 기술지킴서비스, 기술 유출 방지 시스템, 해외 기술보호 상담 등의 기술 유출 관련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특허청은 경업금지약정 제도를 운영한다. 경업금지약정은 대상자가 경쟁 관계에 있는 업체에 취업하거나 스스로 경쟁업체를 설립, 운영하는 등의 경쟁 행위를 하지 아니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약정이다. 이 밖에도 원본증명제도, 직무발명제도, 법률 자문, 무료 변리 서비스, 비밀 보호·관리 시스템 보급 등을 통해 기술 유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산업부는 산업기술 확인 제도 운영 중이다. 산업기술 확인 제도는 기업 등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이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에 근거한 산업 기술에 해당는지 확인하고, 산업 기술이 침해·유출되었을 때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제도다. 이 밖에도 산업기술 보안실태조사, 핵심기술수요조사를 실시해 시장 실태를 확인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기술 유출 피해를 경우, 당사자 간 합의 (기술분쟁 조정·중재) 과정에 드는 비용을 중소기업 기술분쟁 조정·중재위원회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조정·중재에 필요한 대리인(변호사) 선임 비용은 최대 1,000만원, 조정 불성립 등 연계된 소송 비용은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해준다. 조정 진행 중 발생하는 특허심판(특허무효심판, 권리범위확인심판 등) 비용은 최대 500만원까지 지원된다.
법률적 지원이 필요한 경우,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을 통해 무료 법률 자문할 수 있다. 피해 사전 예방 차원에서 영업 비밀 및 지식재산권 관련 계약서, 기술보호 관련 서류작성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피해를 당 후에는 기술 유출·분쟁 대응 관련 방향 설정 및 소송·행정조사 준비를 위한 서면 작성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 전문소송변호사를 통한 민사소송도 최대 4,000만원 이내로 지원된다.
집중단속으로 적발된 기술 유출 사범만 317명
정부 부처의 사전 예방 장치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 기술 유출에 대한 사전 대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협력재단에 따르면 중견·대기업의 임직원에 대한 비밀유지서약서 체결 비율이 90% 이상인 반면, 중소기업은 63.2%에 불과하다. 중소기업 경업금지약정 체결 비율도 24.3%에 그친다.
유출 피해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국정원에 따르면, 2017년 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적발한 산업기술 유출 시도는 99건에 달한다. 유출 위험을 겪은 기술은 디스플레이 19건, 반도체 17건, 전기전자 17건, 자동차 9건, 조선·정보통신·기계 각 8건 등이었다. 한국의 주력 산업 기술 탈취 시도가 대다수였던 셈이다. 국정원은 이들의 범행이 성공해 해외로 정보가 유출되었을 경우, 22조원에 이르는 연구개발비와 매출액 손해가 발생했을 것이라 추산했다. 탈취 수법은 사람과 기술을 동시에 빼돌리는 방법이 가장 많았다. 동종업계 이직 금지 규제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전혀 관련 없는 회사에 채용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빼돌린 것이다.
지난해 2월부터 진행된 특별 단속을 통해 산업기술 유출 사범이 총 317명 검거되기도 했다. 단속 사례로는 영업비밀 유출 사건이 75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산업기술 유출과 업무상 배임이 그 뒤를 이었다. 대부분의 피해 업체가 중소기업이었지만, 개중 대기업도 16곳에 달했다. 유출은 대부분 임직원 등 내부자를 통해 발생했다. 회사의 기술자료를 빼돌려 경쟁사를 설립한 임원도 있었으며, 기술을 해외 업체로 옮기기 위해 핵심 기술의 성능 시험 결과를 유출한 임원도 있었다. 특히 LG에서 SK로 이직한 직원과 SK 임직원 등 96명이 유출 사범으로 적발되며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솜방망이 처벌’과 미비한 대책
기술 유출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까다로운 현행법으로 인한 ‘솜방망이 처벌’이 지목된다. 해외 기술 유출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사용되게 할 목적’이 인정되야 하는데, 이를 입증하기가 까다로워 처벌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목적범으로 규정되어 있는 현행법을 고의범으로 개정, 외국에서 사용될 것임을 알면서 영업비밀을 유출한 경우에도 처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전 예방과 관련해 더욱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기업은 일정 부분 자체적으로 기술 유출 예방이 가능하다. 보안관리 전담 인력을 지정할 여력이 충분하며, 경업금지 의무 위반 및 기술 유출 피해를 입었을 법률상 조치를 취할 전문 인력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 기간 산업의 경우 국가정보원이 기술 보호를 지원하기도 한다.
반면 중소기업은 기술 유출 피해를 방지할 만한 여력이 충분하지 못하다. 심지어는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도 기술 탈취로 인한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형국이다. 일례로, 엔진 부품 제조업체인 삼영기계는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세계 선박회사에 엔진 부품인 피스톤을 공급하며 기업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후 현대중공업이 자사와 공동 개발한 피스톤 설계 도면을 다른 중소기업에 무단 제공했다는 이유로 수년 동안 소송을 치렀다.
중소기업 SJ이노테크와 한화 사이에서도 유사 분쟁이 발생했다. SJ이노테크와 한화는 기술 유출 여부를 두고 수년째 소송을 이어오고 있다. SJ이노테크 측에서는 2011년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핵심 기술 자료를 한화에 넘긴 뒤, 2014년부터 한화가 인력을 투입해 SJ이노테크와 유사한 제품을 자체 개발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보호를 받지 못할 경우, 중소기업들은 당장 국내 대기업으로의 기술 유출 방어도 어려운 셈이다.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서는 한층 현실적인 대처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