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임금低고용] ③ 눈높이만 높아진 인력, 인력 시장에 신호 효과 부족해
국내 AI 인력, 대부분 기초 내공 없이 유행 따라 논문 쓴다는 지적 있어 실력 부족해도 평가 기관이 판단 못해 구분 안 되는 경우 탓이라는 해석 정부, 기업 각계각층에서 실제 전문 역량 판단할 수 있는 잣대 확보해야
국내의 전문 연구 인력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 중 하나인 김박사넷에 ‘AI 대학원 저는 말리고 싶습니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이가 많다고 밝힌 연구자 A씨는 국내 AI 대학원 대다수가 수학 실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유행 따라 다른 논문들을 거의 베껴 쓰다시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남들을 따라 하는 연구자는 당장은 진정한 실력자와 큰 차이가 나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행이나 흐름이 바뀔 경우 수학 실력이 탄탄한 경우가 아니라면 새로운 트렌드를 따라가기 힘들어 결국 도태된다는 설명이다.
국내 인력들의 눈높이와 실제 역량 간의 격차
가장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의 역량을 필요로 하는 연구직군에서도 대다수가 수학 실력이 부족한 채 대학, 연구기관 등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의 유명 저널을 속칭 ‘A저널’로, 그 외 일반적인 저널을 ‘SCI급 저널’로 지칭한 해외 주요 연구자들은 A저널이 아니면 논문을 출판하지 않을 만큼 시장 격차가 큰 가운데, 한국의 연구 인력 대부분 SCI급 저널에도 출판할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압도적 다수인 탓에, 교육부가 ‘한국 SCI’라는 ‘KCI’ 저널을 승인해주고 있다. 일정 수준의 논문 출판 기록을 채워야 하는 규정을 각 대학 및 연구소 등에 강제하고 있다 보니 타협점으로 KCI에 논문을 출판한 경우에는 SCI급으로 인정해주는 편법을 채택한 것이다.
김박사넷에 글을 작성한 A씨도 수학 실력이 부족해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유행만 따라다니다 나이는 들고, 연구는 힘들어지고, 평생 KCI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K대 B 교수는 단순히 AI 대학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수학을 비롯한 국내 거의 모든 주요 기초학문 지식이 글로벌 시장 대비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논문을 찍어내기 바쁜 상태, 즉 사상누각 상태로 지난 몇 십년간 운영되어 왔다는 것이다.
‘급여 낮으면 일 안 한다’ vs. ‘일 못하면 안 뽑는다’
연구 인력뿐만 아니라 기업 현장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남에서 IT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는 실리콘 밸리 데이터 과학자 출신 C씨는 국내 공학계열 중 최고 명문대 중 한 곳인 K대 석사 학위자인 IT 개발자가 자신보다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답했다. C씨는 “회사 내에 긴급하게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문제를 고쳐 넣는 코드 작업을 해야 하는데, 중요한 업무다 보니 10년 이상 경력에 개발 전문가로 모셔 온 높은 직급 담당자에게 업무를 맡겼으나, 이틀간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길래 직접 데이터베이스를 훑어보고 단 1시간 만에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다”고 토로했다. C씨는 “회사가 해외 솔루션을 쓰고 있어 데이터베이스 구조가 국내 서비스들과 달랐던 것이 원인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학력과 경력에서 국내 최고급이라고 판단되는 인력을 고용해도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해 결국 직접 작업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충격적”이라고 밝혔다.
일부 대기업들이 고액 연봉을 앞세워 적극적인 채용에 나선 가운데, 채용 시장에서 구직자들의 급여 요구액과 업무 역량 간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연봉 7천만원대의 IT 개발자를 고용했었다는 C씨는 “해당 직원이 연봉 액수에 불만을 갖고 이직 준비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는데, 더 큰 문제는 업무 역량이 연봉 4천만원대의 중고 신입 개발자에도 미치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연봉 인상의 필수 요건인 업무 역량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배달의 민족을 비롯한 주요 IT 스타트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받고 고액 연봉을 약속하며 채용 시장에 뛰어들자 업무 역량이 부족해 보이는 인력들마저 기존 업무에 손을 놓고 이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인력 역량을 표현하는 적절한 신호 효과 부족해
과거에는 단순히 기업의 규모에 따라 업무 역량을 가늠할 수 있던 시절도 있었으나, 최근 들어 다수의 스타트업이 투자금을 인력 채용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대기업 출신이라고 해서 역량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는 것이 인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노동 시장에서 업무 역량을 판단하는 주요 신호의 가치가 불명확해진 탓에 업무 역량을 파악하는 데 기업과 인력 모두 한계를 겪고 있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정보 비대칭성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연구 직군의 경우 다수의 KCI 논문 출판 경력을 내세우며 A저널, SCI, KCI를 구분하지 않는 정부 산하 기관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었고, IT 개발자들에게 실제 업무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입사에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코딩 테스트’ 답안을 미리 알려주는 서비스들도 생겨났다.
삼성역 일대의 기업가치 6천억원대 스타트업에 인사 담당자로 재직 중인 D씨는 “담당팀에서 역량 평가를 받아 연봉을 협상하는 자리에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며 채용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연봉 최상위권 기업에서 원하는 실력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음에도 같은 수준의 연봉을 요구하는 경우를 최근 들어 수 차례 겪고 있다고 밝히며 “자신들이 그 수준이 안 된다는 걸 왜 못 깨닫는지, 그걸 깨닫게 하려면 어떤 장치를 활용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내부의 인사·채용 문제를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과거와 달리 학벌이나 전 직장의 규모와 같은 요소보다 실제 실력이 중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엄격한 자기 평가 없이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수집한 정보들만 믿고 본인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은 부정적이라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