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 등 테크 기업들 ‘뉴욕 상장행’ 택하자 대규모 펀드 조성으로 이탈 방지 나선 英 정부, 한국은?
ARM, 투자자 기반 탄탄한 ‘뉴욕 증시’ 단독 상장 택해 미국 ‘단독 상장’ 막기 위해 전 총리까지 나선 영국 정부 ‘스타트업’ 붙잡기 위해 대규모 펀드까지 조성, 우리나라도 대책 마련해야
일본 소프트뱅크그룹(SBG) 산하의 영국 반도체 설계(IP) 업체 ARM이 미국 주식시장 상장 절차에 돌입했다. 영국 등 금융 선진국은 자국 스타트업의 미국 증시 상장 문제를 막기 위해 대규모 펀드 조성 등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도 상장 전 투자유치 등 기술 기업에 대한 국내 상장 활로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나스닥 상장 위해 증권신고서 제출한 ARM, 상장 시기는 ‘미정’
지난 1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ARM은 나스닥 상장을 위한 증권신고서 초안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했다. 다만 소프트뱅크 측은 정확한 상장 시기와 규모 등에 대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내놨다.
특히 올해 최대 규모의 IPO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지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ARM은 미국에서 단독 상장을 목표하고 있다”면서 “ARM이 올해 말 나스닥에서 자사주를 매각해 80~100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현재 ARM의 기업 가치는 최소 300억 달러(40조1,14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상장 후 주식은 대부분 소프트뱅크가 보유할 것으로 보인다.
ARM이 나스닥 상장을 택한 이유
ARM이 상장을 추진한 배경에는 소프트뱅크가 최근 몇 년간 핵심 투자사업인 비전펀드에서 막대한 손실을 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프트뱅크는 현금흐름 개선을 위해 2년 전부터 미국 엔비디아와 매각 협상을 벌였지만, 정부의 반독점 심사와 경쟁사의 견제로 무산된 바 있다. 이후 여러 반도체 기업 사이에서 인수설이 돌았으나, 설에 그치고 말았다.
매각 실패 이후 IPO로 출구 전략을 선회한 소프트뱅크는 미국과 영국 증시 동시 상장을 고려하다 최근 미 증시 단독 상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뉴욕증시의 탄탄한 투자자 기반이 단독 상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업계 평가다. 골드만삭스(GS)는 “일반적으로 미국 증시만큼 다양한 투자자가 존재하는 시장은 드물다”고 평가하며 “(ARM이) 더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나스닥 상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분석했다.
국내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도 “국가별로 상장 제도가 상이하다. 자국과 타국 동시 상장의 경우 까다로운 기업공개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하므로 상장이 시급한 기업들엔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올해 미국 증시가 회복 추세를 보이는 것도 기업들이 미국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편 현재 ARM이 자금조달이 필요한 환경에 놓였기 때문에 상장을 서두르는 이유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달 20일 IT 전문지 일렉트로닉스위클리 보도에 따르면 소프트뱅크가 ARM 지분을 담보로 약 85억 달러에 달하는 대출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출 조건에는 “지난해 3월부터 18개월 안에 ARM이 상장하지 않으면 ARM이 소프트뱅크의 부채를 떠맡게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자금조달이 시급한 상황으로 풀이된다.
‘스타트업’ 자국 상장 유도하는 금융 선진국들
영국 등 금융 선진국들은 자국 스타트업이 미국 시장에 단독 상장하는 일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과거 영국 정부는 ARM의 뉴욕 상장행을 막기 위해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등 정부 고위 인사까지 직접 나서 런던증시 상장을 설득하기도 했다.
ARM을 놓친 영국은 늦었지만 영국에 기반을 둔 스타트업을 위한 수십억 파운드 규모의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상장 전 투자유치를 지원함에 따라 자국 스타트업의 뉴욕 상장행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본격적으로 나선 셈이다.
니콜라스 라이온스 런던금융특구 시장은 “현재 추진 중인 미래성장펀드(Future Growth Fund)는 영국 연기금으로부터 최대500억 파운드(약 83조5,000억원)를 조달해 빠르게 성장 중인 기술 및 생명공학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상장을 눈앞에 둔 비상장기업들이 자금 부족으로 위기에 놓여 있다”며 “이들 기업 입장에선 기업가치를 더욱 인정해 주는 시장이 있다면 당연히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이번 스타트업 펀드 조성 배경을 드러냈다.
한편 국내에서도 상장 전 투자유치 등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 2021년 쿠팡의 나스닥 상장 이후에도 컬리 등 해외 상장을 고민하는 유니콘 기업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VC 심사역은 “금융당국이 코스피 상장 요건을 완화하는 등의 당근책을 내놓고 있지만, 우리나라도 영국과 같은 대규모 펀드 조성 등의 과감한 투자유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특히 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정부와 정치권의 의견 수렴 역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보인다”면서 “복수의결권 법안만 보더라도 처음 벤처 업계가 제안한 지 10년 만에 통과됐다. 이렇게 제도적 변화가 더디면 어느 기업이 국내 상장을 고려하겠는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