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빠져나가는 자금·기술 막아라” 미 의회, 대중국 투자 VC 조사 착수
‘안면인식 AI 개발’ 중국 스타트업에 투자한 VC들 대상 “대규모 중국 투자, 미국의 기술 리더십 해쳐” 중국 정부, VC 큰손 빠져나간 빈자리 메꾸기 위해 분투
미국 의회가 중국 스타트업에 자금을 투입한 벤처캐피탈(venture capital, VC)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중국의 차세대 기술 개발에 대규모 달러가 유입되는 것을 비롯해 자국의 기술이 유출될 우려 등에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19일(현지 시각) 로이터통신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은 최근 미국 하원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이하 특별위원회)가 GGV캐피탈, GSR벤처스, 월든인터내셔널, 퀄컴벤처스 등 미국 VC 4곳을 대상으로 인공지능(AI)을 비롯해 반도체, 양자컴퓨터 등 첨단 산업의 대(對)중국 투자를 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GGV캐피탈 등에 대(對)중국 투자 자료 제출 요구
특별위원회에 따르면 GGV캐피탈과 퀄컴벤처스는 중국 메그비 테크놀로지, 센스타임 등 안면인식 AI 기술을 개발 중인 회사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그비 테크놀로지와 센스타임은 모두 미국 정부의 승인 없이 미국 기업과 거래하는 것이 금지된 ‘블랙리스트’에 2019년 이름을 올린 곳들이다. 특별위원회는 GGV캐피탈과 퀄컴벤처스에 오는 26일까지 해당 투자와 관련한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상태다.
미 의회의 이같은 강경한 태도는 중국 첨단 산업 개발에 투입된 미국 자본이 중국의 인권침해와 군사력 증강에 기여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기술 리더십을 저해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공화당 소속 마이크 갤러거 의원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데 자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이번 조사의 목적은 대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강력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 행정부는 중국의 첨단 산업에 대한 자국의 투자를 금지하는 구체적인 법적 근거를 오는 8월 말까지 마련할 계획이며, 상원에서는 미국 내 투자자들이 중국을 비롯한 적대국들의 특정 기업에 투자한 내역을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미 최대 VC 세쿼이아, 중국 법인 분리로 정부 견제 벗어나나
미국 투자 업계에서는 지난 6월 초 세계 최대 VC 중 하나인 세쿼이아캐피털(Sequoia Capital, 이하 세쿼이아)의 중국 법인 분리 역시 의회의 이같은 강경한 움직임을 미리 포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세쿼이아 측은 당시 “탈중앙화된 글로벌 투자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 말하며 “2024년 1분기까지 중국 사업을 완전히 독립적인 파트너십으로 전환하고 별개의 회사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세쿼이아 중국 법인은 사업 분리와 동시에 ‘홍샨(Hongshan)’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기존 중앙집중식 백오피스의 지원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그룹과 이익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세쿼이아 중국 법인이 운영 중인 자금은 2023년 7월 기준 약 560억 달러(약 7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세쿼이아 중국 법인의 투자를 받은 기업들은 양국의 견제에 겹 시련을 겪었다. 중국 최대 딜리버리 애플리케이션(앱) 운영 기업 메이퇀은 중국 정부로부터 시장 지배력 남용 혐의를 받아 5억3,380만 달러(약 6,90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당국의 자제 요구에도 미국 상장을 강행한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 디디는 중국 정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자진 상장 폐지했다. 이에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는 자사를 향한 미국 정부의 규제와 입법자들의 감시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5월 말 폴 로젠 미 재무부 투자안보 담당 차관보는 “첨단 반도체, AI, 양자컴퓨터 등 분야에서 미국 자본과 전문성이 중국에 흘러가지 않도록 맞춤형(tailored and narrow) 규제를 마련 중이다”고 밝혔다. 세쿼이아 측은 2~3년 전부터 사업 분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로젠 차관보의 발언이 나온 후 불과 일주일 만에 발표된 중국 법인 분리는 자국 기술이 중국으로 빠져나갈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조치로 해석하기에 무리가 없다는 분석이다.
얼어붙은 중국 투자 시장, 미국 ‘큰손’ 대신하려는 정부
최근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전례 없는 투자 경색기를 보내고 있다. 중국 리서치 기업 윈드(Wind)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스타트업들이 투자 유치한 금액은 2018년과 비교했을 때 86% 급감했다. 과거 중국의 시장성에 주목했던 한국 VC들 역시 미국과 유럽 등으로 눈을 돌렸다. 실제로 2008년 중국에 현지 사무소를 개소하며 중국 투자에 열을 올렸던 한국투자파트너스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를 대폭 축소했다.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서 미국의 성장 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둔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정부는 국내외 VC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2022년 중국 스타트업들이 조달한 자금 중 정부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달했다. 중앙 정부는 2020년 무선통신과 AI 기술 개발에 10조 위안(약 1,8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선전시 정부 산하의 VC 선전창신투자그룹(深圳創新投資集團)은 지난해에만 총 119건의 투자를 집행했다. 이들 정부 투자자가 집중하는 사업 영역은 반도체, AI, 자율주행 등 미국과 경쟁하는 첨단 과학 분야다. 첨단 기술을 토대로 세계 최대 경제 강국으로 거듭나겠다는 중국의 포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중국의 기술 산업은 여전히 상당 부분을 미국 자본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기업들에 투입된 미국 자본은 약 110억 달러(약 14조원)에 달한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미국의 거대 자본이 빠져나간 자리를 모두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무역전쟁에서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기술력 경쟁으로 확대되며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 심화 양상을 띠는 가운데, 미국 자본 의존도가 특히 높았던 중국의 첨단 기술 분야 스타트업들이 이번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