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지는 CVC에 ‘규제 완화’ 목소리 나오지만, “규제 완화는 ‘실버 불렛’ 아냐”
VC계의 큰 손 CVC, 정작 중소기업 CVC는 규제 틀에 갇혀 있어 일률적인 규제책의 한계? “기업 규모별 규제 따로 책정해야” 성과 내기 힘든 국내 CVC, 실질적 문제는 ‘문화’에 있다?
지난해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의 투자 규모가 전체 VC 투자의 31%를 차지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다만 CVC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경우 대기업을 저격한 규제책에 동력을 잃고 스러질 위기에 처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전문가들은 “중소기업 CVC 활성화를 위해선 관련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나, 일각에선 규제 완화만으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CVC 투자, 전체 VC 투자의 31% 비중
3일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민간 지원기관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발간한 ‘한국의 CVC들 현황과 투자 활성화 방안’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VC 투자는 14조3,000억원으로 2021년 대비 17% 줄었다. 이 중 CVC 투자는 4조5,000억원으로 2021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전체 VC 투자의 31%가 CVC에서 발생한 셈이다. 리포트는 CVC를 ‘비금융업 일반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를 위한 금융자본’으로 정의했으며, 자본의 운용 주체에 따라 △GS벤처스·롯데벤처스처럼 기업이 투자 전문 자회사를 설립한 ‘독립법인 CVC’ △네이버 D2SF와 현대자동차 제로원 등 사내에 투자 전담부서를 만든 ‘사내부서 CVC’ △외부 VC 펀드에 출자하는 ‘펀드출자 CVC’로 구분했다.
리포트에 따르면 독립법인 CVC에 비해 사내부서 CVC의 투자 규모가 가파르게 성장했다. 지난해 기준 독립법인 CVC 투자금액은 전체 VC 투자의 13%, 사내부서 CVC는 19%를 차지했다. 사내부서 CVC는 2021년부터 독립법인 CVC의 투자 규모를 추월했다. 특히 올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해당하는 대기업집단 82개 그룹 가운데 CVC 투자활동 이력이 확인된 곳은 52개로 전체의 6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독립법인 CVC 운영 이력이 확인된 곳은 30개로 전체의 37%, 그룹·사내부서 CVC 운영 이력이 확인된 곳은 46개로 전체의 56%를 차지했다. 그룹 내에서 둘 모두 운영한 이력이 있는 곳은 24개(29%)다. 2021년 일반지주회사의 CVC 제한적 보유를 허용한 공정거래법 개정 이후 대기업의 독립법인 CVC 설립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36개의 대기업 독립법인 CVC 중 지난해 이후 설립된 곳은 7개로 전체의 19%에 해당했다.
이런 가운데 2020~2022년 사이 발생한 323건의 M&A 중 절반에 가까운 157건(48.6%)에서 CVC 투자가 선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리포트는 M&A 이전에 이뤄진 CVC 투자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M&A 중 17건은 인수기업이 피인수기업에 독립법인 또는 사내부서 형태의 CVC를 통해 지분 투자를 했다. CVC 투자가 M&A를 염두에 둔 피인수기업에 대한 실물옵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설명했다. 100건의 M&A에서는 인수기업이 피인수기업이 속한 산업분야의 다른 스타트업에 CVC 투자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불연속적 기술변화를 감지하고 적절한 피인수기업을 물색하기 위한 마켓센싱 기능으로 볼 수 있다. 나머지 40건은 M&A 이전에 인수기업이 피인수기업과는 전혀 다른 산업 분야의 스타트업에 CVC 투자를 선행했는데, 이는 CVC 투자활동을 통해 스타트업의 가치를 발굴·평가하며 투자역량을 강화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리포트에서 국내 CVC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책 방안으로 중견기업의 CVC 투자 확대를 제안했다. 연구진은 “공정거래법 제20조(일반지주회사의 제한적 CVC 보유 허용)와 관련해 지난해 기준 법령을 적용받는 일반지주회사 158개 중 대기업은 47개에 불과하다”며 “나머지 111개 기업은 중견기업인데, 대기업을 제한하고자 도입된 규제가 실제로는 중견기업의 CVC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기업 독립법인 CVC의 33%가 재무적 투자자(FI)에 해당하는 반면 비대기업 독립법인 CVC는 절반 이상이 FI로 분류됐다”며 “중견기업이 적극적으로 전략적 투자(SI)에 나설 수 있도록 CVC 투자를 정책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CVC 규제 완화 필요해, 중소기업 CVC 죽어간다”
CVC 규제 완화에 대한 언급은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18일 ‘첨단산업 글로벌 협력단지(클러스터) 육성방안 후속조치 계획’을 발표하며 CVC 규제 완화 조치를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기재부는 CVC 외부 출자 비중 기준을 기준 40%에서 50%로 상향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해외 투자 비율을 현행 최대 20%에서 30%로 상향해 주는 내용도 포함됐다. 해당 조치가 시행될 경우 CVC의 펀드 결성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의견이다. 당초 CVC 설립 운용사들은 펀드를 결성할 때 최소 60%를 그룹 내 자금으로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적지 않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는데, 40%로 한정된 외부 출자 비율이 상향되면 자금 형성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선 여전히 중소기업 CVC 활성화는 요원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일률적으로 묶은 규제 정책이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이에 따라 기업 규모별로 CVC 규제가 다르게 적용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강신형 충남대 경영학부 교수는 “규제책으로 인해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CVC가 더 부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분리해 규제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상당수의 CVC는 일반 VC와 유사한 운영체계를 갖출 수밖에 없다”며 “펀드의 외부자금 조달이 필요하므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지 않는 중소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규제 완화, 실질적 해결책 못 될 것”
그러나 규제 완화가 시행된다 해도 실질적으로 국내에서 CVC 활성화가 이뤄질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CVC 활성화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뿌리는 규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에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CVC 투자의 기본 원칙은 SI로 계열사와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심사역과 관리역 등 CVC 인력 외 펀드 주요 출자자(LP)인 지주사와 계열사 임직원 등 투자 외적 측면의 ‘시어머니’들이 난입하게 된다. SI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인력이지만 때때로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는 “벤처투자 경험이 전무한 계열사 대표가 무리하게 특정 스타트업을 투자하라고 요구하거나 시너지가 기대되는 스타트업을 추천했음에도 업무 과중을 이유로 투자를 무작정 반대만 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문제는 고정된 연봉 테이블이다. VC에 고급 인력들이 몰리는 이유는 파격적인 성과급 때문으로, 기본 급여 외 10억~20억원의 성과급 챙기는 심사역들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주사의 수많은 계열사 중 하나인 CVC에서 이 같은 성과급을 기대하기 어렵다. 수십억원의 성과급이 지급됐을 때 다른 계열사에서 쏟아져 나올 불만을 지주사가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CVC의 연봉 테이블이 고정돼 있다 보니 고급 인력 수급이 쉽지만은 않다.
정부가 일반 지주회사의 CVC 설립을 허용한 지 2년이 지났다. 기업들은 앞다퉈 CVC를 설립했고, 시장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5대 그룹부터 중견 제조기업, 갓 상장한 중소기업까지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자 CVC 투자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낸 CVC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이름만 있고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방증이다. 현 상황에서 규제 완화에만 매몰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거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CVC가 벤처투자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우리나라 벤처투자 업계 내부적인 변혁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